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19 : 휘림의 시야
중학교에 들어온 후 나는 도서부에 들어갔다. 부모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생기부에 쓸 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하셨다.
도서실은 초등학교에 있던 도서실에 비해 더 넓고 쾌적했다. 책의 가짓수와 권수도 훨씬 많았다. 그런 한편으로는 종이 냄새가 났다. 사실 그게 종이 냄새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무껍질에서 나는 향과 비슷하니까 종이 펄프 냄새가 맞지 않을까?
책장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좀 골라볼까하다가 그만두었다.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데미안을 꺼냈다.
손끝으로 책장을 팔랑팔랑 넘긴다.
책의 부위에도 이름이 있다. 종잇장을 접착제로 엮은 부분은 책등, 책 표지가 안쪽으로 접혀있는 부분은 책 날개, 책 표지를 두르는 종이는 띠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책 날개 위에 이런저런 메모를 적으면서 읽곤 했다. 꼭 텅 빈 날개에 하나하나 깃털을 장식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날아오르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 새는 태어나서, 신에게로 날아갑니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입니다."
날개의 결말은 백화점 옥상에서 날개를 퍼덕이려 시도하며 튀어오르며 끝을 맺었다. 그가 날아올랐을지- 아니면 뛰어내리고 만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날아올랐으리라 믿고 있다. 그는 분명 신을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에 대해 제법 꽂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날개를 시작으로 데미안, 이카로스의 날개 설화, 나이팅게일 이야기, 눈의 여왕,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봄봄, 미운 오리 새끼, ... 새가 상징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 네 나이 때면 자아를 구체적으로 형성하고 싶어질 나이잖니. 뭔가 하나에 탁 꽂혀서 들이파는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 너는 아마도 이 다음에 커서 근사한 새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멋진 날개를 갖게 될지 기대되는구나."
" 다들 저를 보면 비슷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직은 잘 이해하기 어려워요."
" 언젠가는 너 역시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너는 생각이 깊은 아이니까 분명히 알 수 있을거야."
선생님께서는 빙긋 웃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 책에도, 날개가 있다는 걸 혹시 알고 있니?"
선생님께서 숨을 한번 고르시고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셨다.
" 그것도 비유적인 표현인가요?"
" 비유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내가 지어낸 것은 아니고 정말로 국어 사전에도 적혀있는 표현이란다. 책을 보면 표지 종이가 안쪽으로 접혀있지? 그 부분을 책 날개라고 부른단다. 선생님은 그 표현을 참 좋아해. 책 날개 부분에는 대개 저자의 이력과 생각이 적혀있는데, 그 부분을 펼쳐서 읽다보면 꼭 정말로 저자의 날개를 보는 것 같거든."
선생님께서 말을 마치시던 순간, 창가에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외양의 큼직한 새 한 마리가 앉았다. 깃털이 빳빳하고 눈매가 제법 부리부리한 것이 누가 봐도 도시에서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녀석이었다.
" 황조롱이구나. 이런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맹금류인데, 네 덕에 귀한 구경을 하는구나."
그 새와 시선이 마주쳤다. 새의 시선 속에 흐릿한 내가 비쳤다. 황조롱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큼직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버렸다.
시선을 오래도록 맞추다보니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익숙해진 게 아니다. 나는 이전에 분명히 저런 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기분을 기시감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상당히 나중의 일이었다. 감상에 잠기려던 순간 스피커에서 학교 종 소리가 울렸다. 머지않아 교문이 잠길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 시간도 늦었고, 마침 새도 날아가버렸으니, 슬슬 집에 돌아가봐야겠어요."
" 선생님도 이제 퇴근해야겠구나. 문단속은 선생님이 할테니 먼저 나가보렴. 오늘 책 정리하느라 고생이 많았단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렴."
학교 건물 밖을 나설 때 즈음에는 하늘에 스륵스륵 불그스름한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서부 활동까지 마치고 귀가하는 날에만 바라볼 수 있는 운치있는 풍경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사실 초등학생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서실이라는 그 작은 공간에 마음을 기대어 정직하게 그런 시간을 지켜나갔다. 그건 지나간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터득한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