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그 후의 이야기 :: 삶은 끝나지 않으니까.
*과거 일기에서 발췌한 초고입니다.
언젠가의 나는 간절함이나 절실함 같은 단어에 집착했다.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사회는 지금보다 더 노력을 강조하던 시절이었다. 사당오락이니 재필삼선이니 하는 말이 유행했는데,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나는 그 말이 사자성어인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어린이답게 지금보다 주변 환경에 예민했고, 환경이 주는 자극을 흡수하려고 했다.
다들 노력하면서 살고 있길래 나 역시 나름대로 노력했다. 친구들이 학원에 가니까 나도 학원에 갔다. 친구들이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밤을 샌다기에 나도 따라서 커피를 때려먹고 밤을 샜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게을러서 열심히 안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그것은 " 지속 가능한 " 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지금 성인이라서 물리적으로 청소년만큼의 체력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현재의 나는 성장기가 아니라 엄연히 노화를 시작하는 시점에 섰다. 자원이 한정되어있다는 뜻이다.
사실 청소년기라고 매일매일 체력이 넘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체적인 체력이 받쳐줘도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쉽게 흔들렸다. 어떤 날은 갑자기 청춘 만화 주인공처럼 살고 싶다며 잠과 싸워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워 그 게임을 완벽하게 다 깼다. 어떤 의미로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게 공부가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지금의 나는 그럴 체력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조금씩 꾸준히 해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최선을 다한 경험이 의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하루에 내가 몇시간을 잤는지 공책에 계산해 적어가며 공부해봤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 7시 전까지 학원에 가야하는 생활을 해봤다. 나는 학교폭력을 겪어도 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폈고, 쉬는 날에 실기 연습을 하러 나왔다. 그 결과가 객관적 수치로 어떠했건 간에, 나는 지금 그런 노력을 다시 해보라고 해도 감히 할 수 없다. 그럼 그 당시의 나는 최선을 다한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최선을 다해봤기 때문에 적어도 나의 최선이란 무엇인지 기억으로는 알고있다.
그렇게 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최선이 뭔지 몰랐을테니까, 뭔가를 시도해도 그 순간의 기준에 만족했을 것이다. 앞으로 넘어질 일도 없었겠지만, 더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에도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구린 점은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나보다 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게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하루 세시간을 자면서 공부한다고 하고, 어떤 직장인은 새벽 세시에 퇴근해 그날 아침 아홉시에 출근한다고 한다. 내 기준에서는 정말로 마약을 하지 않는 이상 대체 저걸 어떻게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누군가는 진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
최선의 위에는 최선이 있다. 근데 그 최선은 이제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한다.
누가 그걸 알아주느냐는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나는 내가 내 노력으로 내가 나아지는 것을 관조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하면 세상이 나를 주목하지는 않을지언정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나를 멀리서 보며 " 다행히 나름대로 잘 살고 있구나. " 라고 생각해준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냥 그 사실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게 손가락질 하던 사람이 이제는 나보다 좋지 않은 처지에 놓인 것을 보면서 잠깐의 부도덕한 유쾌함도 느낀다.
적어도 지금은 그것이 다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쌓아가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이 다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