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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Sep 27. 2023

뒤늦게 부치는 편지

이 글을 읽는 이가 누구이든지, 이것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늦은 아침에 얼굴을 스치는 선선하고도 촉촉한 바람의 촉감에 잠에서 깨었다. 입추가 지나고도 가시지 않던 더위가 드디어 가셨네.

나는 며칠 전 문득 네게 전해야 할 말이 떠올라 컴퓨터를 켰어. 오늘 당장 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무리임을 나 역시 알고 있는 터야.

조바심이 들더라도 결국 나는 기꺼이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하겠지. 인쇄기를 켜서 지면에 인쇄를 하고, 그것을 고이 접어 봉투에 봉하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골라 붙이고, 네게 전해지기까지 기다리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말이다. 그러니 그리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런 순간순간을 기꺼이 즐기려고 노력하려고 해. 내게는 삶은 지나치게 긴 나머지, 즐기려고 일부러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너무 지루한 것이기 때문이야.

서론이 길어져서 미안하다. 이걸 읽는 네 시간도 소중한 것일진대 내가 배려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머쓱하구나.


나는 네가 했던 말을 아주 오래도록 생각했어. 곱씹고, 고찰하고, 사유하고, 거부하고, 수용하고... 그게 이제는 너의 문장인지, 나의 문장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으리만치 주머니 속에 넣고 오래도록 만지작거렸지. 이제는 그 말 한 마디가 내게는 물리적인 선물로 실재하는 모양이야.

사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어. 너는 정성과 애정을 담아 뱉은 말이겠지만, 나는 도리어 네가 나를 싫어해서 홧김에 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지. 어리디 어렸던 나를 용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너와 헤어진 후의 나는 계속 자라갔어. 나는 내가 이미 다 자란 어엿한 어른이리라고 제멋대로 실감하고 있던 차에 깜짝 놀랐지. 지금은 어떻게든 더 배우고 싶고,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 헤매인다는걸 생각하면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어. 게다가 그 「자란다」라는건, 옛적의 나는 당연히 꾸준히 좋아지기만 하는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거든. 거기에 대해 어른들은 내게 「 성장이라는 건 늘 계단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조바심을 내면 아니된다. 」 라고 하셨지. 돌이켜보면 그조차도 틀린 말이였어. 나는 언젠가 걷다보니 강을 만나서,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은 일이 있었어. 이제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되리라 짐작하고 한발짝 내딛은 순간, 다리가 무너져 물에 빠지고 말았지. 애초에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발걸음을 내딛은 순간 나는 이제 헤엄쳐야만 했지. 물에서 나왔을 때는 푸욱 젖어있었고 말이야.


사람들이 모든 것을 미리 예측해서 내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환상적인 바람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적이 없지. 그래서 너는 그것을 내게 아주 함축적으로 전했어.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면 이해하리라는 작은 소망을 담아서 말이야. 나는 지금도 내가 너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네가 아니니 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건 오로지 너와 신만이 아는 것일테야. 나는 오히려 어른이 되어가면서 내가 얼마나 너의 단편만을 알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거든. 나의 생각이라 함은 점점 구체적이 되어가겠지만, 점점 정확함을 확신하기는 어려워질 것을 알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가 알게 된 것들을 토대로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뿐이야. 아주 아주 오래도록, 많이 생각하다보면 그 중 하나 쯤은 괜찮은 것이 얻어걸리지 않을까 기대하는거지. 내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사는 인간인지 드러나는 대목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금 당장의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이야.


언젠가 그리 말했지, 이성적으로 최선이라 믿는 선택을 현실적으로 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차선의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의 최선이라고. 사실 최악을 배제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이제서야 얼핏 동의해.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바보같은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될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 말에 나는 동의할거야. 그 말에 담겼던 무게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서.


2023년 8월 28일

처서가 조금 지난 어느 습한 늦여름으로부터

나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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