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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22. 2023

입시미술에서 배운 것들 :: 노력과 운수에 대하여

 안내 :: 본인의 과거 일기에서 발췌한 초고입니다.

나의 논리로 차마 설명할 수 없던 행운과 불운들도 있었다.

내가 나에게 징크스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지만 꼭 불안감을 갖고 시작해서 다급하게 버저비터로 "완성"해낸 것들은 좋은 평가를 받거나 합격통지서를 주거나, 적어도 1차합격자나 예비합격자라는 타이틀은 가져다주었다.


중학교 3학년 연합고사 때 처음 해보는 발상 주제인데 무서웠던 원장선생님이 내 등 뒤에서 자꾸 안가고 서있길래 덜덜 떨다가 그림을 뒤집어서 그렸는데 그게 A-. 항상 더럽게 못그려서 오기로 수십장씩 그린 파인애플이 연합고사 A-였던가 A0였던가, 훗날 경기대학교 합격증을 갖다 준 것도 파인애플이었다.


예고 시험은 두 과목을 보는데 놀랍게도 두 과목 다 실수했다.

소묘에서 진달래꽃 시를 받고 그에 대한 내 감상을 그리는게 화두였는데, 나는 한의 정서를 표현한답시고 후경에 생전 그려본 적도 없는 인물을 그린답시고 처녀귀신의 뒷모습을 그려넣었다. 학원 선생님은 썩 문제가 있는 그림을 그린 건 아니지만  아마 평가하는 교수가 널 너무 특이한 애로 볼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합격했고 1학년 때 시험장에서 귀신을 그렸는데 합격한 아이로 통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수채화에서는 출제 정물을 덕성여대나 중앙대, 경기대처럼 미리 리스트를 알려주었는데, 그 두 개가 출제된다면 중 주전자보다는 알타리무를 주제로 잡고 그리는게 낫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시험날 둘 다 출제되었고, 어떤 정신머리였는지 주전자를 주제로 잡고 그렸다.

...왜 붙은거지.....?

아침 7시까지 학원에 가지 않으면 학원 문을 잠궈버리는 생활을 했으니까 실수해도 붙을 수 있었던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건가.....?


2017학년도 수능을 굉장한 하루로 기억한다. 6월 모의고사에서 5등급을 받았던 국어는 그 날따라 비문학 지문이 술술 읽혀서 시간이 평소보다 덜 부족했고, 찍은 문제도 많아야 두세개 즈음이었다. 수학 시간은 당연히 잤고, 점심시간에 친구랑 운동장에 앉아 밥을 먹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이대로 시간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컨디션으로 영어를 풀었는데 역시 거의 찍지 않았다. 한국사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1등급이었다.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도 힘들었던 사탐은 그저 짬짬이 보아왔는데 생활과 윤리가 3등급이었고 사회문화가 4등급이었다.

집에 가서 가채점을 했을 때 내가 평소에 받았고, 원했던 성적대에서 벗어난 과목이 없었다. 전부 컷트라인에 걸린 높은 등급으로.

...내가 그 동안 수없이 내신에 찍힌 5,6등급의 숫자를 보고, 6월 모의고사의 5등급을 보고 모든걸 지레 포기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17년도 정시 때는 북어는 거의 수십장도 아니고 수백개쯤 그렸던 것 같다. 그게 나한테 합격증은 안줬지만 그 후 다시는 북어 못그렸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도 없었다.

그 해 가군 숙명여대 시험을 말아먹고, 그 날은 차마 학교에 돌아갈 수 없었다.

교실에 돌아와서도 패닉해서 주저앉아있는 나한테 친구가 일어나서 정물 정돈하고 스톱워치 다시 찍으라고 말했다.

그 애는 내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우리끼리도 해낼 수 있다면서 다독였다.

그 날 그림은 딱히 잘 그린 것도 아니었고, 나군 시험날 아침까지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덜덜 떨면서 그려낸, 잘 그렸는지도 잘 모르겠는 그 날 그림은 그 해 유일한 예비 7번짜리 그림이 되었다.

...오히려 어려운 정물이 전혀 출제되지 않았고(휴지, 새끼줄, 맥주병 따위였다), 성적대도 안전하게 넣었고, 전날 마지막 그림을 괜찮게 그렸다고 믿었고, 현장에서 실수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떨어질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경기대학교는 예비 38번으로 기억한다.


  2018년도 정시 때는 시험 중간에 도저히 못하겠어서 화장실에서 30분 정도 울고나온 적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날 내가 울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미완성하지도 않았다는 점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침에 망쳤다고 화를 냈던 화분 하나에 그 날 하루를 갈아넣었고, 그건 그 해 입시에서 적어도 내가 가장 잘 그린 그림으로 남았다.

미완성할뻔했던 인천대 시험작은 간신히 울먹이다시피, 거의 손끝을 던져가며 완성했기에 그 그림은 떨어질거라 믿었다. 모종의 이유로 등록은 하지 못했지만 나는 수석합격자였고 나도 기억나지 않는 그 그림은 아트앤디자인 홈페이지에 우수작으로 걸려있었다.

경기대학교에서는 도통 완성하는 법이 없었던 파인애플이 출제되었다. 1분 단위로 시계를 보면서 부들거리며 그린 그 파인애플도 나한테 합격증을 가져다주었다.


2019년도 반수를 처음 할 적에는 서울대학교 시험을 처음 치는 거나 다름이 없었음에도 그럭저럭 그린다는 평가를 받았고, 같이 준비하던 경희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 1차에 합격했다. 동국대학교 시험에 내가 현역때부터 매년 징크스처럼 한번쯤은 나오지 않을까라며 매 해 정시 마지막날 반드시 그리곤 했던 투명 우산이, 그것도 내가 외우는 각도로 나왔다.

...서울대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교에 예비 호조차 없이 떨어졌다.


...내가 노력으로 쟁취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왜 결과만으로 일희일비하느라 내 노력조차 무시하고 잊어버렸을까? 또 다른 날에는 왜 자만했음을 몰랐을까?


왜 내 삶에서 내게 보이는 것과 내가 보고싶은 것에 몰두하며 나만의 세계관을 굳건하게 지켜왔을까?

사실 내가 느끼던 바에 비해 세상은 노력과 성취가 비례했던게 아닐까?


나는 과거를 많이 돌아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나를 잘 알고, 나름대로 세상의 원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오산이었다.


...어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개 통찰력이 좋다는 것을 나도 어른이 되어갈수록 느낀다. 나는 그렇지 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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