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의 꿈을 태연히 짓밟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게 다 널 위해서야'라고 고개를 숙이다가도, 눈물을 훔치면서 '어제 먹다 남은 돈가스 있는데, 데워 먹을래?'라고 순식간에 화제를 옮길 수 있는, 매우 억세고 거침없는 존재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p61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인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이 엄마를 묘사한 글이다.
엄마는 딸을 승부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책에서 말했지만 내 기억 속 엄마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뭔가 내 몸속 깊은 내장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안, 원망, 분노가 한꺼번에 터진 적이 있었다. 엄마한테 서운함을 말하면 받아들여줄 줄 알았다.
엄마랑 싸운 일 중 이런 일도 있었다.
둘째 임신 중이었을 때였던 것 같다. 엄마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게 돼서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 집 구경을 왔다 가게 되었다. 커피랑 과일을 먹고 좁은 집이지만 요기조기 들여다보면서 집 구경도 하고 평소랑 다를게 없이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문제는 돌아가신 후에 일어났다.
'현옥아, 할머니까지 오셨는데 저녁까지 네가 대접해야 되는 거 아니니? 그게 어른 대하는 법이지. 네가 시부모님이 안 계셔서 다행이지. 안 그랬음 너 엄청 욕먹었을 거야. 너 몸 무거워서 그런 건 알겠는데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아마도 이런 내용의 문자였다. 불편한 기색 없이 잘 있다 가놓고 갑자기 이런 문자를 보낸 엄마가 황당했다.
평생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엄마 입장에서 나는 시어머니도 안 계시고 어른 대하는 법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으려나. 아니면 자신이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서 혹여 할머니가 엄마한테 뭐라고 할까 봐, 그래서 미리 선수 친 걸까 별의별 생각이 스쳤다. 도대체 엄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러나 몹시 화나고 엄마지만 불쾌했다.
엄마는 자기감정에 앞서고 상대방 감정을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기 말이 다 옳고 내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건 열등의식 때문이라는 식이었다. 아이까지 낳고 엄마를 그렇게 이해 못 하겠냐는 식이다. 자식이 부모를 왜 꼭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제가 잘못했어요. 화 푸세요.'말하면, '나도 지나친 것 같다'라고 말해 줄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런 법도 없었다. 모나지 않게 잘 살라고 할 뿐. 엄마는 '감히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난 엄마를 이기려고 한 게 아니라 내 마음 좀 알아봐 달라고 했을 뿐인데 언제나 일방통행, 수평선을 걷는 우리 사이가 너무 힘들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엄마 삶 없이 가족 부양에만 집중한 걸 생각하면 그 당시엔 가족의 연을 끊어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이제 엄마도 나도 사소한 말에 의미 부여하지 않고, 촉을 세워 듣지도 않는다. 사실 나는 지금도 가끔 엄마 말이 거슬릴 때가 많은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이 몸에 베여 전 보다 가볍게 살고 있다.
엄마처럼 딸을 키우는 나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딸과 대화할 때마다 엄마와 내 관계가 떠오른다. 엄마의 말 한마디에 위축되던 나를 생각하면 딸한테 가벼운 말 한마디라도 아무렇게나 말할 수 없게 된다. 안 그래도 딸이 가끔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