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자존감 틀어막기

by 책사랑꾼 책밥

원래부터 살림에 소질이 없긴 했지만 책 읽기 시작한 후로 살림이 더 재미가 없어졌다. 솔직히 아예 하고 싶지 않다.

남들은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며 비우고 정리하는 살림할 때, 나는 갈수록 살림하는 시간을 미니멀하게 옮겨갔다. 책 읽기를 시작하고 이제부터라도 나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 어떻게든 책 읽는 시간,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육아, 살림이 전부였다. 남편은 취미 생활이 없는 나에게 운동을 해봐라, 부동산 공부를 해봐라, 집에 있는 게 답답하면 차라리 일을 해봐라, 사람들도 좀 사귀고 그러라고 했지만 내가 진심으로 좋아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고선 당장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고 엄마 역할 외엔 꿈도 없고 미래를 위한 준비가 없는 사람 대하듯 구는 남편의 태도가 거슬렸다.


낮에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있는 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던가. 해도 해도 티 나지 않는 청소를 마치고 한 10시쯤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마시면 금방 점심시간이다. 혼자 먹는 밥은 또 왜 그렇게 맛이 없는지. 우아하고 있어 보이게 브런치 카페를 간 게 아니라면 점심은 거의 빵이나 라면, 대충 때우는 식이었다. 가끔 남편이 밥을 사준다면 순댓국 정도? 예쁘게 옷 쫙 뺴입고 소문난 맛집에 가도 되지만 바로 애들 올 시간이 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내가 늘 거절해왔다.


내가 남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뾰족하게 구는 게 당연한 반응 아닐까 생각했다. 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은 그야말로 자존감 미니멀 그 자체였다. 언제 내 자존감이 이렇게 바닥에 찰싹 붙은 건지...


책 읽기를 시작한 건 애초에 아이들 독서 교육이 목적이었는데 무너진 자존감을 먼저 되찾는 게 급선무였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고 엄마란 이름으로 산다니 부끄러웠다. 미니멀하다 못해 싱크홀만 한 구멍 난 자존감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시간을 쪼개 읽는 독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한텐 황금시간이었다. '백미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의 틈새도 이용했다. 월, 화, 수, 목, 금, 토 드라마를 보는 대신 책을 한 권씩 완독 했고 그 성취는 효과가 직빵이었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건 대단한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족도 중요하지만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라는 핑계로 내 한 몸 챙길 시간이 하루 10분도 안될 리 없다. 내 상황이 불리하다고만 생각했다. 아이가 어려서, 남편은 바쁘니까 내가 집안일도 육아도 전담해야 돼서, 나는 전업 주부니까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이 나를 끌어내리는 원인들이었다.


아무리 옆에서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말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다. 늘 내 상황이 안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바꿔 생각하면 나만큼 자유로운 직업이 없더라. 똑같이 아이 키우면서 직장에 나가는 여성들에 비하면 최고의 프리랜서 아니겠는가.

생각의 전환. 나는 터뜨리지 못한 불만과 불평이 만들어낸 구멍 난 자존감을 생각의 전환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공간에서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내가 거창한 타이틀을 갖지 않더라도 노력하는 나에게 만족할 것 같다.


집안일이나 육아를 잘해야만 좋은 엄마, 괜찮은 아내로서의 내가 아니라, 약해지지 말고, 뒤처지지 말자는 말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키워보자고 다짐했다. 가끔 그렇지 못한 날도 자주 있었지만 아직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어 본다.


여전히 살림은 최소한의 시간을 쓰는 중이다. 이젠 여유가 생겨 밥할 시간까지 쪼개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아도 되지만, 책 벗과 글 벗을 만나 노는 일이 익숙해졌고 구멍난 자존감도 조금씩 채우는데 일조한 책 벗, 글 벗 들과 이렇게 노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독서모임, 참 좋은데 뭐라 더 표현할 방법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