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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Mar 23. 2022

문득 엄마 생각이 나서


안방 문을 닫고 속옷이 든 종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런 뒤 가만 부엌을 둘러봤다. 부엌은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양 어수선했다. 개수대 위론 칼국수 그릇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고, 시렁에는 시든 양파와 사과 몇 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시선은 곧 가판 위의 도마에서 멈췄다. 어머니의 칼 앞에서였다. 칼은 도마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졌지만, 여전히 신랄하고 우아한 빛을 품은 채였다. 감자기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밀려왔다. 뭔가 베어 먹고 싶은 욕구, 내장을 적시고 싶은 욕구, 마침 시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사과 몇 알이 보였다. 나는 한 손에 사과를 다른 손에 칼을 쥐었다. 자루는 손에 꼭 맞았다. 툭- 푸른 껍질 위로 조그마한 상처가 났다. 나는 그 안에 칼날을 박고 돌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김애란, <칼자국> 중에서

닳고 닳은 칼자루에서 엄마를 온전히 느끼는 장면은 잊을 수 없었다. 김애란 작가의 섬뜩하리만큼 섬세한 표현이 읽는 장마다 소름 끼치게 놀라웠다.


부모님 두 분 다 확진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진 까닭인지 유독 엄마 생각이 나는 날이다.

우리 엄마의 부엌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최신 주방도구는 내가 몇 년 전 선물한 에어프라이어, 내가 쓰던 대용량 믹서기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쓰던 수십 년 된 믹서기를 아직도 쓰고 있었다.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벗겨지지 않는 손때를 제외하면 큰 굉음을 내며 김장 때 마늘, 양파, 고추를 열심히 갈아대며 엄마를 돕는 기특한 물건이다.


엄마는 그 믹서기를 절대 고수했다. 그걸 쓸 때마다 엄마도 엄마를 생각했을 테지.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만 생각해주는 엄마가 쓰던 물건을 물려받아 쓰는 기분을 엄마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푸른 껍질 위로 툭- 하고 조그마한 상처를 낸 칼자루로 사과를 깎으며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소리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다. 우리 엄마가 외할머니가 쓰던 믹서기를 고집해서 쓰던 이유도 아마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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