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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Jul 14. 2021

할머니 오는 날이 그렇게 싫었는데...

5년 전 아빠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아들이 있는 스위스에 생전 처음 해외여행이란 걸 갔는데 가기 전에 국가 건강검진을 마치고 스위스 어디쯤 서있을 때 031-xxx-xxxx에서 수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가 참 거슬렸다고.

도착해서 바로 병원을 찾았고 여행 떠나기 전 받은 위 내시경 중 떼어낸 종양에서 암이 발견된 것이다.


집안 공기는 장마에 오랫동안 환기시키지 않아 곰팡이 핀 눅눅한 냄새가 나는 집이 되어버렸다.


서둘러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했고 다행히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수술을 받았다. 초기였지만 위를 절반은 잘라냈고 안 그래도 먹는 거 좋아하는 아빠에게 이것도 먹지 마라, 저것도 먹지 마라, 술은 절대 안 된다는 의사의 지침 아래 가족의 잔소리가 수술 통증보다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런 아빠를 지켜보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올해로 96세 되는 내 할머니. 그러니까 아빠의 엄마다.



할머니는 아빠 말고도 아들이 둘이나 있었는데 옛날 어르신들의 흔한 민간요법을 믿고 병을 놔두어서 일찍 잃었다고 했다. 아빠는 동생들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고 그 옛날 한참 술을 드실 때는 늘 동생 생각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잃은 자식 때문인지 할머니는 74세 된 아들을 아직도 끔찍이 챙기고 걱정한다. 밥을 덜 먹으면 자기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덜어주고, 반찬을 아빠 앞으로 옮겨주고, 할머니 드시라고 사다 준 간식거리도 아빠를 먼저 먹게 하려고 안달이다. 그런 할머니의 자식 사랑을 아빠는 수년째 거부한다. 할머니 혼자 짝사랑 중이고 아빠는 계속 밀어낸다.



암수술 후에 아빠는 정기검진은 다닌다. 올해로 5년 차인데 아직까지 탈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식단을 꾸며 준 덕이라고, 엄마 아니었으면 누가 아빠를 이렇게 돌봐주었을 거냐고 엄마 목소리가 커진다.


오늘이 바로 그 검진일이었다. 엄마 아빠는 일찍 서울을 가셨고 엄마 집에 가지러 갈게 있어서 들렀다. 할머니 간식도 샀다.

혼자 얼마나 적적하고 아빠가 걱정되었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할머니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침도 11시가 되어 겨우 한술 뜨고 설거지를 하던 참에 내가 도착했다.


"할머니, 왜 이제 아침 드셨어. 어디 아프셔?"


"야, 왜 이제야 오냐. 너도 애들도(손녀들) 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뜸했냐." 대뜸 그런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가 집에 오는 날이 무지 싫었다. 숨을 데가 있다면 숨어 있고 싶을 만큼.


그땐 할머니도 힘이 세고 목소리고 카랑카랑했었다. 아빠 사랑이 큰 데서 알 수 있듯이 할머니는 손주들도 아들 손주를 무척 사랑했다. 남동생 생일이 가까워 오면 서울에서 내려와 손수 떡을 만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 먹을 간식도 잊지 않았지만 아들 손주 먹일 간식은 다른데 숨겨두거나 우리 것과 양이 다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먹을 것 좋아하는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치사하게 먹는 걸로 사람을 차별하다니.

게다가 남동생보다 월등하게 체격이 좋은 나는 늘 표적 대상이었다.

"여자애가 그렇게 살이 쪄서 어떡하냐."



할머니 드릴 단팥빵, 카스텔라를 식탁에 올려두고 나오려는데 할머니는 나를 붙잡았다.

병원 간 당신 아들 걱정, 자기가 너무 오래 산 탓에 늙은이 밥 차려주느라 하고 싶고 가고 싶은데 마음대로 못 가는 며느리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온다는 거다. 엄마 아빠는 할머니 걱정할까 봐 뭐든 간단하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할머니는 그게 무척 서운하단다. 늙어서 못 알아들을까 봐 무시하는 거 같다고 말이다.


나한텐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 정이 더 깊었기 때문에 한 번도 할머니를 걱정하거나 챙겨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 먹을 것뿐 아니라 여러모로 차별받은 기억 때문에도 그렇다. 그랬던 할머니였는데 내가 보고 싶은데 안 온다고, 왜 안 오냐고 투정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카랑카랑한 호랑이 할머니에서 눈 초점도 흐리고, 귀도 안 들리고, 기억도 많이 지워졌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관자놀이가 움푹 패인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나는걸 억지로 참느라 혼났다.


겨우 단팥빵 두 개, 카스텔라 한 개 사 갖고 간 것뿐인데 어릴 때 먹을 것도 많이 못 사줬는데 항상 올 때마다 자기 간식 사다 준다고 고맙다는 할머니 말.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나랑 동생이랑 똑같이 대해주지 않아서 삐쳤던 그날들을.


빵 드시다가 목 메이지 말라고 우유 사다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엄마랑 아빠가 집에 도착하셨는지, 할머니 마실 베지밀 한 상자 사서 다시 가봐야겠다.


할머니가 집에 오는 날이 그렇게 싫었는데

할머니 보러 집에 자주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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