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하고 내 주위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된다면, 그 물결이 결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풍토와 관습을 바꾸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의 변화는 습관을 바꾸지만, 공동체 변화는 관습을 바꾸게 됩니다. 결국 문화가 바뀌는 것이지요. 어둠의 문화에서 밝음의 문화로,
경쟁과 살육의 문화에서 협력과 상생의 문화로,
파괴와 저주의 문화에서 창조와 축복의 문화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하고 우리가 시작하면 바뀔 수 있습니다.
-조신영 <나를 넘어서는 변화의 즐거움> 중에서
저는 성장이란 단어와 함께 변화라는 단어도 좋아합니다. 변화가 없다면 나태해지질 가능성이 있기에 줄곧 변화를 꾀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뇌의 가소성을 믿기에 주기적인 뇌의 자극을 위해 독서를 함으로써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책과 친하기 전에는 변화가 두려웠습니다. 목표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었고, 한 곳에서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모를 정체가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려다가도 '에잇, 이거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조금 하다가 말겠지 뭐!'라고 생각했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나의 변화 보다는 공동체의 변화를 외쳤던 날이 훨씬 많았기에 어쩌면 변화가 뎌디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종원 작가님의 <부모 인문학 수업>에서 이야기한 '도덕과 정의의 차이점'을 읽고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나의 변화 보다는 공동체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줄곧 이야기를 한 저를 돌아보게 만든 것입니다.
도덕의 잣대는 나 자신이고 정의의 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도덕은 나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고, 정의는 상대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의는 그저 정의를 외치는 걸로 충분하다. 그걸로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도 든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하지만 정의만 추구하는 사람은 나보다는 타인의 잘못에 관심이 많다. 나를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약점을 들추며 상처를 양쪽으로 더 크게 벌린다.
사람들이 변화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를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정의 보다는 도덕을 외치는 자가 많아질 수록 세상은 한결 따뜻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갖어 봅니다.
잭 캔필드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에서 알게된 '영국 성교회 주교의 묘비 문'은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변화시켜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끔 합니다.
-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묘비 문-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 묘지)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리라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는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나'라는 사람의 변화는 곧 우리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오늘도 작은 변화를 꿈꾸게 됩니다.
나 변화를 넘어 우리의 변화를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