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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맹샘 Nov 22. 2021

전면 등교 첫날, 초등학교는 어땠을까?

급식실은 낯선 침묵이 감돌았다.

"선생님,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급식을 안 먹는 게 낫겠어요."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장 10여분 동안 강조된 급식실 사용 수칙에 아이들이 시무룩해졌다. 무려 1년 8개월 만에 이루어진 전면 등교. 아이들이 매일 나온다는 사실에 잠을 설쳤다. 설렘과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교실급식을 하다가 전면 등교가 되자 급식실에 가야 했다. 정말 아이러니했다. 오히려 교실급식을 늘려야 할 때, 인력부족을 이유로 우리는 급식실로 가서 빈자리 없이 앉아서 급식을 해야 했다. 확진자는 3000명이 넘었다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지켜야 할 수칙 3가지를 이야기했다.


1. 줄 서기 전에 체온 재기 및 손 소독. 이건 그동안도 해왔던 코로나 기본 수칙이다.

2. 마스크를 벗으면 고개를 돌리거나 말하지 않기. 비말 감염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다.

3. 급식실에서 자리는 지정좌석. 혹시 모를 확진자 역학조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들은 1번을 말할 때는 수긍하더니 2번에서 얼굴이 어두워지고, 3번에서 한숨과 좌절의 소리를 내뱉었다. 사실 초등학교 급식실은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아무리 제지해도 아이들의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은 막을 수가 없다. 사실 아이들의 너무도 행복한 웃음에 다른 사람에게 심하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강하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코로나 이전의 급식실은 아이들 친목의 장소였다. 친한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후다닥 급식을 먹고 운동장에 나가 뛰어 논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 까르르 웃고, 선생님에게 와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귓속말도 한다. 물론 티격태격 다투어서 상담도 하고, 복도에서 뛰어서 혼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코로나 이전 우리들의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비상사태다. 절대 급식하면서 말하면 안 된다. 좌석이 지정되어야 혹시나 모를 확산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교실에서는 내가 아이들을 한눈에 보면서 급식을 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게 하는 게 쉬웠지만 급식실에서는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미리 말하고, 또 말하고, 다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감염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그렇게 우리는 몸을 움츠렸다. 지정좌석에 앉아 고개 돌리지 말고 말하지 말고 급식 먹기. 그게 우리에게는 최선이다. 그 모든 것이 코로나 시대 우리들의 점심시간이다.


아이들이 지정된 자리에 급식판을 들고 앉았다. 급식실 첫날이기 때문에 일일이 아이들이 앉을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번호순으로 급식을 받아 온 아이들이 차례로 앉는다. 아이들을 다 앉히고 아이들이 어떻게 앉았는지 사진을 찍는다. 첫 번째 목적은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고정좌석에 앉는지 기억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 목적은 혹시나 모를 역학 조사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이 영 착잡하다. 아이들이 모둠활동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 역학 조사를 위해 급식 자리를 찍다니. 시절이 원망스럽다. 사진을 찍으니 해맑게 V 표시를 하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시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앉히고 2반에서 7반 선생님께 자리를 다시 한번 안내하고 지정좌석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학년부장의 자리는 참 무겁다. 학급별 급식 순서 정하기부터, 자리 정하기까지 신경이 쓰인다. 선생님들도 분주하다. 


선생님들과 다른 반 사이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우리 반 아이들을 항상 내 시선에 둔다. 내가 너무 강조를 했는지 몇몇 아이들은 한 입 먹고 마스크를 쓰고, 또 한 입 먹고 마스크를 쓴다. 급식실에는 정말 낯선 침묵이 감돈다. 진짜로 마음이 애리다. 교실에서 이야기할 때 아이들은 도대체 코로나가 뭐길래 우리를 이렇게 답답하게 하냐고 하소연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가 뭐길래. 급식을 먹고 재빨리 마스크를 쓰고 흩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먹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는데. 아이들이 마스크를 꼼꼼히 점검하는 모습이 참 씁쓸하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침에는 특별실 사용이나 모둠활동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전제 조건은 학교에서 협의를 통해 학교의 책임에 달려있다. 난 코로나 이전에 이렇게 학교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코로나 내내 모든 것은 학교의 협의를 통한 학교의 책임을 찾았다. 혹여나 확진자가 나서 교실 내 감염이 생길 경우 책임과 죄책감은 학교의 몫이었다. 학교가 협의를 통해 결정했으므로 학교가 책임을 져야 했다.


전면 등교를 앞두고 특별실 사용에 대해 선생님들과 논의했다. 확진자가 진정세를 보이고 있고, 정부에서 위드 코로나로 진행한다고 하니 특별실 사용에 모두 찬성했다.  함께 특별실에 가보았다. 음악실은 긴 의자 하나에 3명이 붙어 앉아야 했다. 영어실은 긴 책상 하나에 2명이 붙어 앉아야 했다. 우리는 말없이 교실로 돌아와 특별실 사용을 포기했다. 모둠활동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입모양이 보이지 않아 서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에게 매일 같이 비언어적 표현과 반어적 표현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정말 와닿는다. 가림판을 두고 모둠활동을 하기에는 모둠활동의 의미가 살지 않고, 그렇다고 가림판을 걷어내기에도 맘이 편치가 않다. 코로나 이전의 모둠활동은 불가능해 보였다.


전면 등교가 시작되었지만 달라진 점은 더 높아진 불안감과, 더 움츠려 든 교사와 학생들이다. 코로나가 1년 8개월 동안 모두들 열심히 정말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사실 올해 초에 학생 수라도 감축되어 교실 당 인원수라도 줄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여전히 아이들은 교실에 복닥 복닥 했고, 좁아진 교실에 아이들은 더 좁은 가림판 안에서 살아야 했다. 전면 등교를 대비해 교실급식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인력부족으로 오히려 급식실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보다 상세한 가이드라인과 지침으로 안전한 위드 코로나 교실을 기대했지만 학교가 결정해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코로나로 함께 안전하게 생활하는 학교를 기대했다. 전면 등교 때는 좀 더 아이들과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기대했다. 그러나 모두들 허둥댔고, 모두들 책임을 넘기기에 바빴다. 교사들은 책임을 지고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말이 늘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내뱉는 말이 잔소리가 아님을 알기에 더욱 조심하고 움츠려 들었다.


집에 와서 전면 등교 첫날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아이들 앞에서 하루 종일 진지하게 안전을 강조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급식실에서는 미간이 찌푸려져 아이들의 해맑은 V에도 웃지 못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교실과 급식실에서 조심하고 움추려들던 아이들의 작은 어깨가 떠오른다. 마스크를 고쳐 쓰며 가림판 안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리거나 화장실만 조용히 다녀오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떠들려고 하다가도 선생님이 다가가 '거리두기'를 외치면 스르륵 흩어지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수업 예시로 들면 그제야 배시시 웃는 아이들.


전면 등교 첫날, 우리 교실을 떠올리니 입맛이 쓰다. 마음이 아프다. 오늘 수업 후 만난 동학년 선생님들은 말이 없었다. 앞으로 우리가 견뎌나가야 할 무게가 사뭇 무겁게 느껴졌다. 조용히 내일 개인별로 활동할 만들기 재료를 나누며,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했던 학교를 떠올려봤다.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간절히 기다리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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