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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맹샘 Jan 02. 2022

산타할아버지? 망태할아버지?

양육방식 변화에 따른 할아버지의 변화

내가 자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우리 아이가 자랄 때 가장 많이 듣고 있는 소리

"너 말 잘 들으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신대."


현재 부모가 된 세대 중에 망태할아버지를 듣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산타할아버지보다 망태할아버지와 더 가까이 살았던 세대일 것이다. 어렸을 적을 돌아보면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린 기억보다 망태할아버지가 날 데려갈까 봐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더 크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 매년 오긴 했지만 일 년 내내 산타할아버지가 양육에 있어 등장하지는 않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나타나는 망태할아버지가 내 어린 시절에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혹시나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망태할아버지가 날 커다란 망태에 넣어서 데려가지는 않을까, 긴장하며 엄마 말을 잘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아이가 4살 때, '망태할아버지가 온다.' 연극을 함께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어린이 1인극이라고 했고, 집 앞에서 하길래 별생각 없이 데려갔었는데 아이는 연극을 보고 나오자 사색이 되었다. 특히 '망태 할아버지 무서워'노래를 부르며 망태할아버지 손이 관객석으로 넘어올 때 그 놀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말을 안 듣는 아이는 입을 꼬매버린다던가,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망태에 담아 간다던가 하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충격을 느끼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내 손을 꽉 잡았고, 다녀와서도 한참 두려움에 떨었다. 그 모습에 내심 아이다움이 느껴져 귀엽기도 했지만 걱정되기도 했다. 혹시 아이에게 두려운 기억을 심어주었을까 봐.


그런데 이제 6살이 된 아이는 망태할아버지보다는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라고 있다. 산타할아버지만 이야기하면 의젓한 형아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글쎄, 산타할아버지가 우는 애들을 다 안다지 뭐야. 착한 일 하는 사람에게만 선물을 준데."라고 말을 할 때마다 어찌나 어른스럽게 행동을 하는지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물론 아직도 망태할아버지를 이야기하면 더 잘 훈육이 먹히겠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망태할아버지 대신 산타할아버지를 소환하곤 한다. 유치원에는 12월 23일에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는데, 그 산타할아버지가 24일 밤에 각자의 집으로 온다고 했다며 엄청나게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안 되는 실력으로 선물을 포장해서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 나의 어린 시절 공포의 대상이었던 망태할아버지, 우리 아들의 어린 시절 기다리는 대상인 산타할아버지. 둘 다 아이들을 바른 행동으로 이끌기 위함이지만 양육방식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망태할아버지는 잘못된 것을 혼내는 훈육이 주목적이다. 부모님으로는 겁먹지 않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부모님의 말을 듣게 한다. 물론 지금도 도깨비 전화 같은 것으로 아이들을 겁주는 형식의 훈육도 존재하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공포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선생님들 손에는 회초리가 함께 했다. 손을 들고 벌을 서기도 하고, 책상에 올라가 허벅지를 맞기도 하고,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공포가 우리의 규율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각종 매체에서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아동학대라고 이야기하고, 교실에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동학대라고 한다. 자식에게 소리 한번 안 지르고 기르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교실에서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지금의 교사이다. 산타할아버지와 같은 칭찬의 도구로, 칭찬 스티커, 학급 온도계, 마이쮸가 회초리 대신 선생님 손에 들려 있다. 물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잘한 일은 칭찬하고, 잘못된 일에는 무관심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한다.


이러한 양육과 사회의 변화를 나타내 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나를 키웠던 건 망태할아버지인데, 우리 아들을 키우는 건 산타할아버지다.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사회와 잘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울지는 사실 모든 부모들의 고민이다. 어떤 부모도 내 아이를 엉망으로 키워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내가 생각하는 잘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가며 아이를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 변화 한가운데에 있는 할아버지의 이름. 벌써 우리 아들은 2021년의 산타할아버지를 보내고, 2022년의 산타할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난 마음속에서 망태할아버지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을 때마다 산타할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있다. 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글을 읽는 부모님들은 어떤 할아버지를 마음에 두고, 어떤 할아버지를 입 밖으로 꺼내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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