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프롤로그
그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고 있었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과는 달리, 내 안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명함에서 직책 두 글자가 사라졌을 때, 나 역시 함께 지워진 것 같았다.
나는 28년 동안 대기업이라는 구조 안에서 살아왔다. 숫자와 공정, 인과관계가 분명한 세계에서 문제를 쪼개고 답을 찾아내는 방식이 나의 생존법이었다. 성과를 내면 다음 과제가 주어졌고, 그 과제를 넘어서면 또 다른 목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성장이라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성과를 밀어 올릴수록 나 자신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리더라는 직책이 사라진 날, 나를 설명해 주던 언어 또한 한순간에 의미를 잃었다.
상실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의 일상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출근길은 유난히 무거워졌고, 자리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한참 뒤처져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이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가 먼저 떠올랐다. 가능성보다 한계가 먼저 보였고,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 질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 예고 없이 나를 붙잡았지만,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직책이 아닌 언어로, 조직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배워야 했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해, 다시 나를 소개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이다. 이 글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직책을 잃은 중년이 배움과 질문을 통해, 무너진 자신을 다시 붙잡아 가는 기록이다. 완벽하게 정리된 결론도 없다. 다만, 흔들리는 순간마다 나를 다시 세우게 했던 몇 가지 질문과, 그 질문을 견디게 해 준 사람들, 그리고 배움과 기록으로 버텨낸 700일의 시간을 남기고 싶었다.
늦은 시작은 없다. 다만, 시작을 미루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