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지워진 28년의 기록
나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습관처럼 집무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모든 동작은 늘 하던 대로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나치던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말소리는 눈에 띄게 낮아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주 바닥이나 모니터로 향했다. 누군가는 괜히 바쁘게 움직였고, 누군가는 말을 아꼈다. 무언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몇 마디 오가는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이미 짐작했다.
잠시 후 상위 리더의 호출을 받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평소 다니던 상사 집무실로 걸어가는 짧은 거리마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노크 후 차갑게 식은 문손잡이를 돌려 집무실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른 굳은 표정의 상사는 애써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주 앉은 뒤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회사의 경영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기에 비상 경영, 조직 효율화 등 그동안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익숙한 단어들이 차분한 어조로 이어졌다. 말은 정제되어 있었고, 감정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었다. 그동안 좋은 성과 내며 중요한 조직을 잘 이끌어 왔다는 변명 같은 칭찬이 잠시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짐작했던 말이 나왔다.
“안타깝게도 황 담당의 조직은 폐지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놀랍거나 격한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상황은 분명한데, 마음은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갈 곳을 잃어 잠시 방황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다는 무심한 대답을 했으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질문도, 감정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집무실을 나서는 나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보여야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안에서는 무너지고 있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메일 서명이었다. 이름 뒤에 적힌 직책, ‘담당’이라는 두 글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호칭이 순간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삭제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나와는 분리된 언어였다. 현실과 어긋난 미련을 혼자서 계속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날의 결정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조직 존속에 대한 불안은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 것일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성과를 내왔던 지난 시간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리더로서의 안타까움은 곧 상실감에 빠질 구성원들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 자신의 상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말이다.
내가 조직에서 맡고 있던 일보다, 그 일을 설명해 주던 이름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일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던 가장 확실한 가면을 잃고 있었다. 회의 석상에서 나는 늘 ‘○○ 담당’으로 불렸다. 그 호칭은 질문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역할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언제 말해야 하는지가 두 글자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 구조 안에서 오래도록 움직여 왔다. 그런데 그 경계가 사라지자, 나 자신도 함께 흐려졌다.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질문이 실제로 던져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스스로에게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더 이상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의 나를 지탱해 주던 구조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없어도 회사의 일상은 여전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깨달음은 생각보다 차갑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다른 조직은 여전히 돌아갔고, 회의는 계속되었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해 나갔다. 그 풍경은 오히려 나를 더 또렷하게 이방인처럼 느끼게 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은 그런 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조직폐지 통보를 받고 도망치듯, 무작정 휴가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나를 설명할 언어를 잃어버린 막막함.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와이프의 물음에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절망감 속에서 혼자만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음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분명한 슬픔도 아니었다. 다만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난 28년 간의 시간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전사 생산성 향상을 담당하는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제품 생산성을 분석하고 개선해 최대의 생산 효율을 끌어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생산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시장 환경 악화의 여파로 제품 수주가 대폭 삭감되었고, 생산 설비 일부는 가동을 중단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생산성 향상 업무의 필요성 또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왜 열심히 일하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질문은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도, 잠들기 전에도 그 질문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동안 나 자신을 지켜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지켜온 것이 아니라 직책이라는 울타리에 나를 맡겨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울타리가 사라진 순간, 나는 바람 앞에 그대로 노출된 기분이었다. 보호받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의존이었음을, 변화된 상황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곧 나를 더 깊은 바닥으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