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이해
중국 출장을 7년 만에 가면서 거의 5년 만에 처음으로
예전에 배웠던 중국어를 사용했다.
오랜만에 중국어를 말하니
한참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회사 입사하고 배우기 시작한 것이 중국어이다.
그 당시 사내 외국어 어학당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영어보다 중국어 수업이 훨씬 많았다.
가까운 곳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제2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니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퇴근하고 할 일이 없었던 것이 큰 사유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등록을 한 이후로는
주 2~3회씩 꼬박꼬박 수업을 들었다.
회식과 수업이 겹치면 회식에 늦게 갈지언정
수업을 빼먹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선배와 동료들 모두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중국어를 2년을 공부한 시점에 조직개편이 일어났다. 중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전 지역을 담당하는
부서로 발령이 났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발탁된 것이었다.
중국 출장 다니며 배운 것을 좀 써먹어보려나 싶었는데 웬걸 중국 출장은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이름만 아시아였지 미국/중남미/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를 커버하는 거라 동남아를 넘어 인도, 아프리카, 호주, 이스라엘까지 포함되었고, 내가 출장 간 나라는 인도, 베트남, 대만, 이스라엘이 전부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나 또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면서
근무 지역도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4년을 공부한 중국어를 손 놓게 되었다.
더 이상 중국어와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급 시기가 다가오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진급을 하려면 포인트를 채워야 하는데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야 관련 자격증을 따기란 쉽지 않고
제2외국어 중에서 중국어는 어학등급이 있을 경우
가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수 년 만에 다시 중국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중국어를 배워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라는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절박했다.
1년 내에 반드시 중국어 회화 등급을 획득해야 하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남편도 협조적이어서 맘 편히 아이를 맡기고
새벽과 주말마다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러 다녔다.
그리고 TSC 4급 획득에 성공!
예전에 공부해 둔 이력이 있다 보니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중국어 등급을 땄고 진급도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초급반 선생님은 나더러 중국어를 잘하니까
이제는 3급을 목표로 준비해 보자고 하셨다.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예전 같은 열의가 없었다.
진급이라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중국어를 사용할 일은 여전히 희박하며,
영어 공부는 계속해야 했기에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적인 나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또 한 번 중국어를 손 놓게 된다.
그리고 7년 만에 중국 출장.
그 사이 기술이 발전하여 번역 앱도 많고
택시도 디디 앱으로 호출해서 결제까지 하니
중국 말을 못 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중국어를 할 줄 알면 편리한 점이 많았다.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가 숫자를 말하는데 그게
내 전화번호 뒷자리인지는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AR 글라스를 써봤을 때도 중국어 발화가 되니
기능을 테스트해 볼 수 있었다.
떠듬떠듬 어설픈 중국어이지만 짧게나마 응답이 가능하니
현지인들에게 호감을 준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어설픈 중국어를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썼더니 영어-중국어가 꼬이는 웃픈 현상이...
이렇게 오랜만에 어설픈 중국어를 말하며
잊고 지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열정, 노력, 집중, 눈물, 좌절 그리고 젊은 시절.
그리고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가물가물한 실력.
중국어뿐 아니라 대부분이 애매한 수준인
나의 여러 가지 능력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 언어능력이 좀 뛰어난 줄 알았으나
회사 와서 보니 영어는 늘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영어나 제2외국어는 동시통역이 되거나
(외운 것이 아닌)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경영진 이메일을 대필할 수준이 아니면 늘 애매하다.
책을 쓰긴 했으나 이것이 나를 먹여 살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본디 타고난 나의 능력 자체가
그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더 키울 수 있었던 능력이었는데
나의 선택으로 인해 꺾였던 걸까.
그때 과감한 선택으로 그것들을 집중해서 키웠더라면 나의 인생은 지금 모습과 많이 달랐을까.
출장 갔다가 이렇게 지난날의 내가 했던 선택들과
그로 인한 아련함까지 소환될 줄은 ㅋㅋ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늘 가지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