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이해
회사 생활 구력이 오래되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생긴 취미가 있다. 바로 전체 조직도를 훑어보고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 친하게 지냈던 지인이 지금 어느 부서에 있는지, 지금 직급이 무엇인지 검색해 보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구나, 이 부서의 리더는 누구이구나 등 조각조각의 정보를 이어 붙여 여러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직도를 보면 지금 이 부서가 한창 떠오르는 신생 부서인지, 이 사람이 차세대 유망 주자인지 서서히 fade-out 되는 단계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직도를 보면 내가 각기 다른 경로로 알게 된 두 사람이 한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경우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때도 평소처럼 조직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예전에 나와 함께 일했던 선배와 육아휴직 후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인이 같은 부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받은 업무 협조 이메일에서 이 두 사람이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음... 이걸 이야기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그 선배는 나의 회사 생활에서 만났던 역대급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젊꼰 (젊은 꼰대)의 화신이었다. 그 당시 내가 있던 부서는 사장님의 직속 비서와 같은 업무를 하고 있었다. 메일 대필부터 주요 고객과 미팅 어레인지, 미팅 어젠다부터 미팅 시 사장님이 해야 할 멘트도 정했고 발표 자료의 최종 검수도 담당했다. 선배들은 사장님과 출장도 함께 다녔다. 그 누가 보아도 핵심 최측근임에는 분명했다.
그렇게 사장님의 최측근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잠재되어 있던 권력욕이 샘솟는 사람이 있다. 사장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마치 본인이 사장의 권력을 가진 것인 양 휘두르는 것이다. 당시 차장이었던 그 선배도 점차 안하무인으로 되어 갔다. 함께 일하는 다른 부서 사람이 부장이나 상무나 전무여도 사장을 등에 업고 본인이 최고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유관 부서 사람들은 마치 하청업체 부리듯 지시를 내렸다. 회의 시간에 지각하거나 본인이 소집한 회의여도 직전에 펑크 내기 일쑤였고 밤 12시에도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업무 메시지를 보냈다. 존중과 배려는 찾기 힘들었고 후배들을 도구처럼 대하는 것도 눈에 보이는 태도였다.
동료 중에는 그런 선배여도 잘 참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부서를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면담을 했다. 참을 만큼 참았기에 감정이 좋지 않으니 원만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성이 높아졌고 싸우고 난 후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가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이 귀에 들렸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동료와 일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배도 다른 부서로 발탁되어 가서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5년 이상 시간이 흘렀는데 그 선배가 지인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딱 봐도 느낌에 지인은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을 했기에 이 선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업무로 배정된 것처럼 보였다. 지인을 만날 때마다 나도 과거에 그 선배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있고 트러블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부서를 옮겼으며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임을 말해줄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일했던 시기는 시간이 많이 흘러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 사이 사장님이 퇴임하면서 그 선배는 더 이상 사장님의 직속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고 이 부서 저 부서 떠돌고 있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예전과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내 입으로 험담하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은 일이라 지인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러 그 지인 역시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이제는 지인과 선배가 더 이상 업무로 엮이지 않으니 그와 일하는 게 어땠는지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지인은 왜 부서를 옮겼는지, 그 선배의 안하무인 한 태도는 여전한지 궁금했다. 지인 역시 그 선배와 일하는 게 힘들어서 부서를 옮겼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회의와 보고를 펑크 내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과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예전에 사장님 직속 비서와 같은 역할로 일했던 똑똑하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만 말해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적응 못해서 그런 건가 싶어 엄청 힘들고 고민했다고 했다.
지인과 대화를 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가 느낀 쎄한 점은 대체로 맞다는 것이다.
나의 느낌이 쎄하지만 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남들보다 정보가 적으면 내가 틀린 건가 의심할 때가 많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을 못 할 뿐이지 나의 느낌은 대체로 맞다. 쎄함은 빅데이터이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 느낌을 따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