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부터 현재까지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한 지 햇수로 벌써 3년째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정말 턱밑까지 왔다고 생각이 드는 게 지인들의 온 가족 확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들은 코로나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초등학생, 영유아들이 확진되면서 엄마가 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한꺼번에 확진되거나 한 사람이 나으면 바통터치식으로 다른 가족에게 옮겨가는 식이다. 정말 한집 걸러 한집인 셈이라 난 아직까지는 별일 없지만 언제 걸려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는 누구나 걸릴 수 있기에 이제는 누구 탓을 할 수 없다'라는 분위기로 접어든 것도 비교적 최근이지 코로나 초기였던 2020년만 해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확진되면 젊은 혈기로 이태원의 헌팅 포차나 스키장 다녀와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사람, 회사에서도 대역죄인처럼 바라보는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리 난리를 쳤을까 코웃음이 나올 정도지만 처음 PCR 검사를 했던 2020년 12월 당시만 해도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분위기였다.
회사의 타이트한 관리로 비교적 코로나 청정지대로 알려진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그 동료가 사내 첫 확진자는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건물, 같은 층, 같은 화장실을 쓰는 가까운 위치에서 근무하는 다른 부서 사람이었다.
금요일 저녁 6시, 퇴근을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갑자기 인사과 직원이 돌아다니며 지금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빨리 건물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확진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지금 곧 방역을 시작할 것이며 같은 층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PCR 검사를 받게 되고 2주 격리 대상자는 별도로 연락이 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별도 연락이 갈 때까지 자택 대기하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가족들과도 접촉을 피하라고 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사장님, 전무님, 상무님 석이 나란히 붙어 있어 인사과에서 더 긴장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백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건물 밖을 나오면서 주말 동안 어떻게 셀프 격리해야 하나 걱정을 했다. 집 안에 수험생이 있는 선배님들은 재빨리 해외 출장자들이 주로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동료 여직원들의 경우 대부분 자녀들이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이라 코로나에 대한 걱정이 공포로 커지고 있었다. 나는 마침 시어머니가 혼자 지내시는데 가까이 계셔서 시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오시게 하고 내가 시어머니 집에서 격리하기로 했다. 집에 가자마자 이틀 지낼 짐을 후다닥 꾸린 후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일단 격리는 해결되었고 남은 일은 PCR 검사를 받고 음성 판정을 받는 일이었다. 회사 안에 선별 진료소가 있기에 수원 거주자는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소팅해서 차례가 돌아온다고 했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 검사를 받아야 빨리 결과가 나올지 찾아보고 직접 검사받기로 했다.
검사는 토요일에 하게 될 것이다까지만 알려주고 대략적인 시간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확진이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없는 사이 아이는 누가 봐줄 수 있을까? 걱정과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긍정마인드를 가지신 분들은 어차피 지금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격리기간 동안 밀린 영화나 실컷 보겠다 하셨지만 나는 TV를 틀어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릴 뿐이었다. 나도 책이며 노트북을 챙겨 왔지만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무엇 하나 집중할 수 없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6시에 잠이 깼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 나의 검사 순서와 시간이 문자로 전달되었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끼니 때우고 회사로 향했다. 선별 진료소에 늘어선 기나긴 줄, 그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가까운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여전히 답답했다. 검사 후 결과는 내일 전까지 문자로 개별 통보될 예정이니 계속 격리하고 있으라는 안내를 받고 시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검사까지 마쳤으니 큰 고비는 넘긴 셈인데 여전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서성이며 창 밖을 내다보다가 한숨 내쉬기를 반복했다. 어찌 보면 다시 오지 않을 이 꿀 타임을 남들처럼 영화를 보거나 평소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지 못하는 나의 밴댕이 마인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도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바로 필사였다. 두뇌회전은 공포와 불안으로 멈추었을지언정 나의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필사 노트가 있었기에 책을 따라 그냥 써 내려갔다. 이 세상에 남겨진 존재라곤 책과 노트, 펜 그리고 '나'가 전부인 듯했다. 이런 무한 고립감의 한가운데서 세 번째 손가락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써 내려가니 어느새 내 마음은 점차 차분해지고 고요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몇 시간 내려놨던 휴대폰에는 수십 통의 메시지가 있었는데 나의 음성 결과 통보 문자와 동료들의 소식이었다. 다행히 모두 음성이 나왔고 이제 셀프 격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 역시도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극적 상봉을 하고 그날은 편안히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여유 시간이 생기고 휴대폰이나 TV가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독서이다. 그리고 독서마저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글쓰기와 필사를 할 수 있다.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옥중에서 그리고 유배지에서 글을 썼음은 사례를 굳이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남아돌아서(?)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식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최고의 방안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물론 명상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명상을 하루 종일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필사나 글쓰기는 하루 종일 하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안한 당신께 필사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