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피할 것인가 이겨낼 것인가
직장의 이해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는 여러 단톡방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끈끈한 인연은 아이가 3세 때 어린이집 같은 반이었던 엄마들 톡방이다. 3세에 시작해서 9세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직장 어린이집이다 보니 단순히 육아 정보뿐 아니라 워킹맘으로서 직장생활의 애환도 함께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 단톡방에서 한 엄마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000 선생님 기억하시는 분 계실까요?"
000 선생님은 아이가 4세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무척 미인이셔서 신랑이 시동생과 소개팅을 시켜주고 싶어 했었고, 아이의 발달사항에 대해 상담할 때 같이 눈물 흘리기도 했어서 비록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름을 듣고 단박에 기억이 났다.
"네, 000 선생님 기억하죠. 4살 때 담임이셨잖아요. 선생님께 무슨 일 있으신가요? 혹시 결혼이라도 하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선생님이 지금 다른 어린이집 계신데 아동학대 사건으로 소송에 휘말리게 되셨대요. 그래서 혹시 탄원서를 써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셔서요."
"네???? 아동학대요? 소송요? 탄원서요?"
어이쿠야 이게 무슨 일이람...
"아이가 다쳤는데 초반에 합의가 잘 안 돼서 결국 일이 그렇게까지 되었나 봐요. 오죽 답답하셨으면 저한테까지 연락하셨을까 싶더라고요. 000 선생님이 우리 첫째, 둘째 때도 담임 선생님이셨거든요."
상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여기까지 전해 들어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동학대라니... 비록 5년 전에 겪었던 선생님이지만 그 선생님의 인품과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상황임을 알기에 나도 자필로 탄원서를 써서 드렸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트라우마에 시달려 과연 다시 어린이집 교사로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역시도 사회 초년생 시절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후 아예 업무를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나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이 그러한 것처럼 전공을 살려 SW 엔지니어로서 시작했다. 사실 대학 입학하면서 컴퓨터를 처음 만져봤기에 프로그램과 코딩의 ㅍ, ㅋ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힘들게 공부를 했다. 대학시절 내내 프로그램 말고 내가 더 잘하는 것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저 꾸역꾸역 학교 공부를 따라갈 뿐이었다. 나는 수능을 다시 칠 용기도 없고 전과를 할 학점도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졸업해서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겨우겨우 학점을 채워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엔지니어라는 직군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입사하고 거의 1년 동안 프로그램을 할 기회가 없었다. 일단 신입사원 교육이 거의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그룹 입문 교육, 전자 교육, 사업장 입문 교육에 부서 배치를 받고 나서도 프로그램 기초 교육을 듣느라 사무실에 거의 가지 않았다. 각종 교육이 끝나자 또 몇 달 동안 주어진 일은 세미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동기들의 고민은 "우리는 도대체 언제 일을 하게 될까?", "일을 시키지도 않는데 우리를 왜 뽑았을까?"였다.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지만 신입사원이 그렇게 오랫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착수되는 프로젝트마다 드롭되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초기 세팅 때문에 바빴지만 킥오프 미팅 후 한 두 달 만에 드롭되니 신입사원들에게까지 배분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교육과 세미나로 거의 1년을 보내고 나서야 전략 모델 개발에 투입될 수 있었다.
전략 모델 개발 멤버가 되자 또 정신없이 바빠졌다. 밤새는 일, 주말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번에 SW 릴리즈만 하면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고 편하게 잠잘 수 있겠지라며 최종 릴리즈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개발한 모델의 TV 광고는 시작되고 있었다. 막판 스퍼트를 올려야 된다며 다들 좀비처럼 비몽사몽 헤롱 거리면서 사무실에 남아 있었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는 시점에 최종 릴리즈를 했다. 출시되었으니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장 VoC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버그를 해치워야 했다.
출시 한 달이 지나자 조금 잠잠해지는 듯했다. 밤샘하는 일이 줄어들고 어쨌든 어두워지면 퇴근하고 해가 뜨면 출근하는 정상 루틴으로 돌아왔다.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은 순간이었는데 내가 담당했던 부분에서 역대급 큰 버그가 발견되었다. 출시하고 한 달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의 무조건 100% 발생하는 버그였다.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100% 발생하는 버그인 데다가 고객사에서 알려온 거라 반드시 고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부분이므로 내가 고쳤고 SW를 릴리스했다. 문제는 수정하고 여러 번 테스트했음에도 불구하고 릴리즈 후 똑같은 문제가 또 발생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공장의 생산라인이 멈추게 되었다. 대책 회의가 열리고 나를 빼고 사수 선배와 담당 PL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엄청 바빴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이 상황에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었고 소스코드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며 부장님 석에서 들리는 회의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모델은 초도 물량 60만 대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대당 가격이 70만 원 수준이었다. 빨리 생산을 해서 납품해야 하는데 라인이 멈추었으니 단순하게 산수 계산을 해도 420,000,000,000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 손실을 내가 다 보상해야 할까, 평생 월급을 차압한다고 한들 보존이 될까,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써야 하나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나는 더 이상 프로그램에 손댈 수 없었고, 결국 같은 업무를 하는 1년 후배가 나서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문제는 일단락 해결되었지만, 여파가 컸던 만큼 문책을 하게 될 수 도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비록 담당자이지만 이제 겨우 2년 차인 사원 나부랭이인 내가 책임을 질 것이냐, 사수 선배이냐, PL인 담당 과장이냐 말이 나돌았다. 그런 말이 오가는 와중에 그 논란이 일시에 사라졌는데 그 이유인즉슨,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팀에서 개발한 모델에서도 내가 개발한 모델과 똑같은 문제점이 발생을 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 모델 숫자가 100만 대가 넘어가고 연관된 부서가 여러 부서가 되니 구조적인 허점이었으므로 받아들이고 책임소재를 묻거나 문책은 하지 않는 것으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나로서는 대역죄인과 같은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나는 엄청 위축되었다. 내가 손을 댄 코드 하나가 이렇게 일파만파 퍼져서 100% 발생하는 버그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공장 생산라인을 멈추게 하다니 너무 무섭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큰 트라우마가 되어서 더 이상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하고 2년 후 나는 기획부서로 이동하면서 직무를 변경하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건을 계기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프로그래밍 실력을 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면 돌파하느니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십 수년째 기획업무를 하고 있으니 위기에 대한 회피가 오히려 맞는 방법이었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어린이집 선생님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떻게든 그 사건은 종결이 될 것이다. 자세한 사건 내막은 모르지만 선생님의 인품을 봤을 때 진상 부모가 아니었나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아무쪼록 그 소송건이 선생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교사를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회피하던 이겨내던 선생님의 선택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