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라바북스 #20 북타임 #제주책방올래 #책방올레
오늘은 맘먹고 떠난 길은 아니었다. 꽃 구경하러 나서고 보니 나도 모르게 책방 앞에 서 있었다.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책방투어가 되어버렸다.
예전(이라고 하기엔 10년도 더 된 이야기) 일본 츠타야 서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동네 외곽, 지하철에서 내려 한적했던 동네길을 걸어 도착한 서점엔 평일 오전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노년의 부부, 개를 데리고 산책 나왔다 들른 사람, 나 같은 여행객...... 주제별로 한데 모인 책들, 그리고 그 책과 인연이 닿은 소품들이 버무려져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머물고 싶은 서점이다, 이런 서점이 집 근처에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츠타야 서점이 생각나지 않는다. 서울의 대형 서점도 이미 머무르고 싶은 문화 공간으로 변화했다. 다만 북적이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데다 사람도 바글거리다 보니 예전 츠타야 서점의 그 여유로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찌 되었건 북 큐레이션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앉아 읽을 공간을 서점에 마련해 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잘 알게 되었다. 이런 공간을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큰길가에 있다. 그런데 간판이 없는 라바북스를 그만 지나쳐 지나가버렸다. 차를 근처에 대고 지도를 보며 두리번거리다 여기쯤 있어야 맞는데, 싶을 때 딱 찾았다. 이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라바북스 좌우의 식당과 카페가 문을 다 닫은 날이어서인지(길눈이 어두운 내 탓이 더 컸겠지만) 더 찾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나중에 알았는데 라바북스 옆에는 하루 30인분 한정판매 가정식을 먹을 수 있는 '바굥식당', 백패커/하이커를 위한 카페 '하이커하우스보보'가 있다. 풀패키지로 바굥식당에서 밥을 먹고 라바북스에서 책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하이커하우스보보에서 커피를 마시면 딱일 텐데. 역시, 계획되지 않은 여행은 이렇게 놓치는 것이 종종 있다.
살짝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 다행이다. 지금 막 들어온 나와 남편 말고도 이미 책 사이를 서성이는 두 사람이 있다! (나를 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작고 아기자기한 공간들 - 주로 독립서점이나 작은 카페 같은 - 에 들어설 때면 빈 공간에 그저 우리 일행만 있다는 사실이 약간은 부담스럽다. 동시에 우리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피하고 싶은 일이다. 누군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 발을 들이밀고, 우리를 이어 또 누군가가 꼬리를 물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참 이상한 성격이지......
책방지기를 슬쩍 본다. 아, 고요하다. 나의 존재를 그저 공기처럼 생각해 주셔서 다행이다. (어쩌면 그분도 그렇게 생각하셨을지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본격적으로 책방 구석구석 탐험한다.
아! 어쩜 이렇게 읽고 싶게 책을 골라두셨을까? 알차다. 공간은 작지만 그 어떤 공간도 허투루 존재하지 않는다. 동화책 책표지가 듬성듬성 액자처럼 꽂힌 전면책장의 여유로움,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잡지들을 마주 보며 한켠에 앉아 눈높이를 낮출 수 있는 공간, 동글동글 글씨로 책을 소개한 메모들, 벽을 가득 채운 소품과 그림들까지... 나는 이런 공간에 머무르는 것은 너무 좋은데, 이런 공간을 만들 줄은 모른다. 그래서 이런 공간이 더 소중하고 부럽다!
취향저격의 책들 중에 한 권만 고르기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고민 끝에 라바북스에서 선택한 책은 "서른두 살, 안식년을 가져보았다". 고민은 내가 하고, 선택은 남편이 했으며, 결제는 내가 했다. 음, 그나저나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나는 다행히도 퇴사 대신 진짜 안식년을 호주머니에 넣고 제주에서 '사는(live) 여행' 중이지만 말이다('사는 여행'이라는 건 이 책 속의 표현!). 나도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날이 있겠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라바북스에선 간판을 못 찾아 허둥댔다면, 북타임에선 간판을 찾은 뒤 문을 못 찾아 기웃댔다. 들어서면 작은 건물이 여럿이다. 그중 두 개가 서점으로 쓰이고 있다.
둘 중 먼저 선택한 건물은 왼쪽. 문에는 오래 이곳을 지킨 책방지기의 인생, 역사가 손글씨로 쓰여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이 분위기는 도대체 무엇? 피노키오 동화 속 고래를 기억하는가? 제페토를 삼킨 고래 뱃속 같은 이곳의 주인장은 피노키오다.
나는 이 고래 뱃속에서 작가 요조의 '아무튼, 떡볶이'를 만났다. 이 '아무튼' 시리즈를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예를 들어 대형 서점이라든가, 인터넷 서점 같은) 이런 호기심과 흥미로움이 돋아나진 않았을 것이다. 소소한 즐거움. 아무튼, 계속! 이 여행살이는 계속되리!
북타임의 두 개의 건물은 명백하게 다른 느낌이다. 오른쪽 건물은 좀 더 여유로운 서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아이 한 명이 포함된 가족이 책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아까 바로 그 책방지기님! 이미 손글씨 타임머신을 통해 뵌(나 혼자 낯익어 반가운) 책방지기님이 아이에게 신나게 말을 건네고 계셨다. 아, 나도 우리 애들 데리고 올걸...... 실제로 이곳엔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면 눈이 돌아갈만한(몇 권이나 집어 들었겠지!) 핫한 신간, 시리즈, 어린이 취향 저격 책들도 많다.
주택을 개조한 것 같은 그 특유의 방, 방 감성으로 방마다 다른 느낌의 책들이(그중 한 방은 어린이용!) 그득하다. 제주에 대한 책들이 모여있는 방에서 잡지를 골랐다. 콘텐츠그룹 재주상회가 출판하는 '제주에 대한' '제주스러운' 매거진, "innn". 심지어 이곳에선 다른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과월호까지 보유하고 있다. 득템 한 기분이다.
언제부터인가 제주의 색깔이, 그 스펙트럼이 다양해진 느낌이다. 수학여행으로 왔던, 관광지만 쭉 돌던 그때 그 시절의 여행이 아니라 개개인의 취향대로, 마음 따라 징검다리 건너듯 여행할 수 있을 만큼 제주만의 매력이 다변화된 느낌이다. 제주의 이 멋짐을 여태껏 나만 몰랐다.
한라산 눈꽃이나, 영실 진달래를 보기 위해 등산화를 챙기는 동안, 또 다른 누구는 오름을 오르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흑돼지와 해물, 갈치구이와 고등어회를 맛보러 왔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해녀의 물질에 깊은 매력에 빠져 해녀박물관, 해녀불턱 근처를 서성인다.
어떤 사람은 화산섬 특유의 검은 돌이 있는 바다 보며 힐링하러 왔다가 어느 순간부터 바닷물에 밀려온 해양쓰레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젠 플로깅, 비치코밍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왜 환경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제주도 산길 듬성 어디 만치에서 봤던 '잃어버린 마을'이 무엇인가 검색해 보던 한 사람은 4.3이 무엇인가 꼬리를 물고 찾아보게 되고, 더 이상 동백의 붉은 꽃이 포토존의 멋진 배경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올레길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둘레길, 성곽길... 전 국토가 이제 걷는 길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제주의 작은 책방.
도시, 그것도 서울에서 출근 전쟁을 하다 살다 온 사람에게 제주는 여유 그 자체다. 관광지 찍고 다니는 여행도 귀찮다. 제주의, 제주만의 조각들을 하나 둘 모으다 보면, 이제 제주에 대해 한 걸음 더 알고 싶어 진다.
나는 그랬다. 그래서 책방을 가기 시작했다.
독립서점, 작은 책방이라는 공간은 대형서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고요하고 정적이다. 라바북스처럼.
그래서 일상에서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제주처럼 누군가의 여행지로 더 익숙한 곳에선 더욱 이런 공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현지인 코스프레하기엔 너무 관광객일 수밖에 없는 동문시장, 올레시장에서와는 격이 다르다. 작은 책방에 매일 오는 단골손님이 분명 아니라는 것을 책방지기도 알고 나도 알지만, 그저 잠시 흘러들어와 머물다 갈 객이라도 이곳에선 온전히 나 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에 아이들을 앞세우기는 쉽지 않다. 순하다, 예의 바르다, 조용하다는 말을 늘 듣고 사는 애들이지만, 아이는 아이다. 몸은 늘 꼼지락거리고, 궁금한 것이 많아 귓속말이지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래서 죄송하다. 그래서 북카페를, 독립서점을 가고 싶을 때면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택하곤 했다. 하지만 북타임 같은 곳도 있다. 아이들을 두고 온 것이 너무 아쉽다는 마음이 든 것은 작은 책방 방문 역사 상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제주의 작은 책방은 360여 개의 오름처럼, 올레길 26코스처럼 제주에 다시 올 이유다.
한 번 올 때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어 모두 정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에 또 다른 책방에 가야겠다.
다른 계절에 다시 또 이곳에 와야겠다.
(참고하기) 제주책방올레지도
http://www.jejugoodtravel.com/pages.php?p=2_2_1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