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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Dec 31. 2020

거드름을 몰아낸 여드름

2020년 12월 31일


초등학교 동창생의 자녀 결혼식이 있었다. 몇 명의 동창생이 참석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담소를 나누었다. 


모두 오랜만이었다. 서로 본 지가 40년도 넘은 친구도 있었다. 한 친구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상영아, 네 손 지금 괜찮으냐?” 


“ 갑자기 무슨 손 이야기야?” 옆에 있던 친구가 궁금해서 물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친구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 추운 겨울철에 난로에 집어넣는 조개탄을 쌓아 놓은 조그만 창고 기억나? 학교 건물 뒤쪽에 있었지. 그 창고 앞에 몇 명의 친구들이 모였어. 그곳에서 힘깨나 쓰는 친구들이 모여 누가 더 힘이 센지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어.” 


40년이 훨씬 넘은 옛 적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 그 친구가 신이 나서 상세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 창고 앞에서 상영이가 힘자랑 좀 했지. 자기 손으로 창고 문을 주먹으로 힘껏 친 거야. 창고 문이 양철로 되어 있었어. 근데 말이야, 양철 문 속에 못이 박혀 있었던 거야. 못 머리 부분이 박혀 있어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크게 다칠 뻔했어. 하여튼 애꿎은 자기 손만 다쳤지.” 


 아직도 내 손등에 그때 못 머리 부분 때문에 생긴 상처의 흔적이 조그맣게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일이지만 쑥스러웠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개구쟁이로 살았다. 힘이 세었고 운동을 잘했다. 축구, 야구, 달리기 등 못한 것이 별로 없었다. 어깨 힘이 좋아 던지기 선수로 군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그런 탓에 나를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고 주로 앞에서 친구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했다.  


그 시절에는 학교까지 등교할 때 마을 앞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부 집합하여 함께 가야 했다. 마치 군대처럼 행렬 이루고 리더를 선두로 행군해야 했다. 나는 6학년 때 우리 마을의 리더가 되었다. 학생들은 나의 지휘 하에 군가나 향토 예비군가를 큰 소리로 합창하며 학교까지 걸어갔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끊어 드높은 사기~”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은 무슨 용사인지, 왜 피가 끊어야 하는지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그렇게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남녀공학이었는데 면 소재지에 하나뿐인 중학교였다. 4개의 다른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 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때까진 아직도 초등학교 때의 힘자랑하며 거드름 피우던 개구쟁이 모습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친구들은 이미 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은 나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복도에서 다른 초등학교에서 들어온 친구와 마찰이 생겼다. 서로 엉겨 붙어 싸움이 났다. 힘으로 그 친구를 뒤집으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상대방은 체격은 왜소했지만 힘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누가 이긴 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싸움이 어정쩡하게 끝났다. 


그때 육체의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 뒤로 내 평생 싸움은 나에게서 자취를 감추었다.


중학교 입학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얼굴 전부를 뒤덮는 여드름이었다. 학교 전체를 통틀어 여드름으로는 내가 최고였다.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남녀공학이라 특히 여학생들 앞에서 더 쑥스러웠다. 여학생 근처에서는 얼른 지나가 자리를 피했다. 남녀 합반도 있었지만 3년 내내 남학생으로만 이루어진 반에 배정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등학교 때처럼 영웅 행세하며 친구들과 무리 지어 놀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용히 책을 보며 공부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여드름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을 꺼려 1학년 때부터 공부에 집중했다. 


4개 초등학교 학생이 모인 중학교 전체에서 1학년 학기 초부터 성적이 2등으로 올랐다. 나를 알던 친구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랬다. 잘 놀지도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는 나에게 쉽게 접근하는 친구도 별로 없었다.


나를 괴롭히던 여드름은 가라앉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내내 그렇게 여드름을 뒤덮인 얼굴로 3년을 보냈다. 여드름 때문에 성격까지 내성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힘자랑하며 골목대장으로 행세하던 녀석이 여드름을 계기로 외부로부터 돌아와 조용히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듯 생활을 하였다.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통해 도시에 진학했다. 역시 각 군 지역에서 학생들이 연합고사에 합격한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성적이 뛰어난 친구가 많았다. 


성적을 기준으로 반 배정을 받았는데 나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다. 월말 고사를 치렀다. 처음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 두 번째 월말고사 때 반에서 1등을 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시에 먼저 올라와 3월에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겨울철 내내 수학과 영어를 잘 공부해 놓은 탓이었다.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게 하는 여드름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연합고사 성적으로 배정받은 내가 반에서 1등을 하자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따로 불렀다. 


“너, 커닝했으면 솔직히 말해!” 


반에는 연합고사 성적이 학교 전체에서 2등을 한 학생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반에서 10등 정도 하던 내가 갑자기 1등을 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뒤로 계속 1등을 해서 선생님도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다. 3학년 학생들이 여름 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자율 학습을 하며 대입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3학년 학생 틈바구니에 끼어서 자율학습을 하고 싶었다. 


3학년을 담임하던 어떤 선생님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선생님이 “꼭 그렇게 하고 싶냐”며 참 희한한 놈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의지가 강했는지 선생님이 허락을 했다.


여름 방학 내내 그렇게 3학년 선배들 사이에서 자율학습을 하며 영어와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선배들은 내가 자기들 사이에 끼어 공부하는 모습을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중학교 때 시작된 여드름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 전체에 났고 고등학교에서도 학교 전체에서 나만큼 여드름이 많이 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3년 동안 자취를 했는데 학교까지 자전거로 등교했다. 아침 일찍 학교를 갔다. 이른 아침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시내엔 아직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전체 고등학생 중 나보다 먼저 학교에 등교한 학생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 도착해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아침 공부를 했다. 3년 내내 그랬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드름은 계속되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대학 4학년이 되어 군에 입대하였다.


3월에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신병 훈련을 받는데 세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비누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그렇게 얼굴에 신경 쓸 틈도 없게 되자 여드름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10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여드름은 군에 입대하면서 그렇게 나로부터 떠나갔다.


중고등학교 10대를 보내던 때에 만약 나에게 여드름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힘자랑하며 기고만장하게 거드름을 피웠던 태도는 여드름 덕분에 꺾일 수 있었다. 내면을 살찌우고 성실하게 사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40년도 지난 옛 날 이야기다. 오늘 하루만 지나면 2021년이 시작된다.


되돌아보면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내 마음대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도 그럴 것이다.


거드름 피우던 사춘기 시절 나를 온전한 길로 가게 했던 여드름처럼 앞으로의 삶의 여정에서도 나를 바로 잡아 줄 여드름이 내 마음 밭에 활짝 피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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