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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Jan 03. 2021

 꿈꾸는 지하 주차장

하늘 맑게 파란 어느 날 낙성대 주변을 걸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는 이곳은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처음 올라온 내가 나중에 고향처럼 여긴 동네이다. 그만큼 나에겐 정감이 가는 지역이라서 한가한 날 이곳을 거닐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내가 살던 집으로 향했다. 사실은 집이 아니라 반 지하 주차장을 찾았다. 마음이 설레었다. 그 집이 그대로 있을까? 내가 살던 반 지하 주차장 방은 어떨까? 아마 그 방은 다른 용도로 개조되었겠지? 상상의 나래가 마음속에 펼쳐졌다.  


제대한 후 대학 4학년에 복학하면서 자취를 했었다. 집주인은 주차장을 개조하여 방 1개를 만들어 월세를 놓았다. 제대까지 한 마당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최대한 절약을 위해 이곳에 월세로 들어갔다.


어둡고 좁은 지하 통로를 쭉 따라 가면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나온다. 방에 들어가 어깨 높이로 나 있는 창문 밖을 내다보면 파란 하늘 대신에 주인집 앞마당이 보인다. 낮에도 전기 불을 켜야 했다.


때마침 당시에 나처럼 제대하고 복학한 친구가 있어 둘이 같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기숙사 같은 방에 함께 배정되어 매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군 입대 전까지 3년 내내 그와 가깝게 지냈었다. 3학년 마치고 함께 카투사 시험을 보았다. 그가 먼저 미군 부대로 배치되었고, 나는 한국군인 한미연합사로 배치되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우연히 둘 다 용산에서 근무하였다. 


빡빡한 군 생활을 하다 보면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주말 한가로울 때 미군 막사에서 생활하는 그를 가끔 찾아갔다. 그는 친절하게 미군 식당으로 안내해서 소위 “짠밥”에 질린 내가 양식을 실컷 포식하게 했다. 어떨 때는 나를 용산 후암동 뒷골목으로 데려가 든든하게 곱창을 먹여 주던 마음씩 착한 친구였다.


그와 낙성대 지하 주차장 월세 방에서 다시 뭉쳤다. 


식사 준비는 음식 솜씨가 조금 나았는지 내가 주로 담당했다. 밑반찬은 만들 만한 실력이 못되어 주로 두부에 콩나물국을 끓였다. 간혹 맛있게 먹고 싶으면 낙성대 근처 재래시장인 인헌시장에 갔다. 오징어를 사서 고춧가루를 넣고 끓이면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식사 준비를 내가 한 대신에 설거지는 그가 책임졌다. 설거지를 할 주방이랄 만 한 곳도 따로 없었다. 


월세는 둘이서 집주인의 아들, 딸을 과외하며 받는 돈으로 해결했다. 그가 주인 아들의 수학을, 나는 딸의 영어를 각각 책임졌다. 과외하는 시간이 되면 지하에서 그 집 거실로 연결된 지하통로를 따라 올라갔다. 집주인은 그들의 자녀를 교육하는 우리를 잘 대해 주었다. 가끔 지하통로를 내려와 우리에게 밑반찬도 가져다주기도 한 고마운 분이었다.


돈도 없고 밥 지을 쌀도 떨어지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땐 서로 헤어져 각자도생으로 알아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어느 날 생활비가 다시 동이 났다. 둘이서 고민 끝에 학교 행정실을 찾아갔다. 졸업앨범 대금으로 학교에 미리 납부한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는 대학 앨범이 없다.


4학년 2학기가 되어서 취직을 준비했다. 우리 모두 언론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고등학교 동기 친구를 매개로 복학생 5명이 더 추가되었다. 총 7명이 모두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다.


스터디 날짜가 되면 복학생 7명이 어두운 지하 자취방으로 우르르 함께 모였다. 서로 준비한 주제를 대상으로 토론하고 각자가 써온 리포트를 평가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내가 음식을 준비했다. 나의 특기인 콩나물국이나 오징어국을 끓였다. 친구들은 밑반찬도 없이 내가 만든 국물을 서로를 마주 보며 맛있게 먹었다. 내 음식 솜씨가 좋아서 맛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 방에서 함께 모여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힘찬 마음이 이미 든든한 밑반찬이 되었던 것이다.


주차장에서의 이 모임이 나중에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모임이 될 줄이야?


이들 친구들을 통해 그들과 같이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송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현재의 아내를 소개해 준 백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이 모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타래처럼 연결된 친구관계의 고리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자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지하 자취방에 모여 미래를 꿈꾸며 준비했던 젊은 날의 그 친구들은 나중에 모두 꿈을 이루었다. 5급 행정고시로 전환하여 국가공무원이 된 친구, 금융감독원에 입사한 친구도 생겼다. 3명은 언론사 기자로 취직했다.


나와 함께 자취하며 TV를 즐겨 시청했던 친구는 나중에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국의 유명 PD가 되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나는 도중에 언론사 대신에 금융기관으로 방향 전환하여 새한종합금융회사에 입사하였다. 둘 다 취직이 되면서 어두운 지하 주차장 방에서 미래를 꿈꾸며 자취하던 시절은 아름답게 종지부를 찍었다.  


한 때 그 친구들이 네이버 밴드를 만들었다. 30년 전 어두운 지하 주차장 방에서 밝은 미래를 꿈꾸며 함께 맛있게 먹었던 콩나물국, 오징어국이 생각난다고 했다. 


친구들은 내 이름을 따서 장난스럽게 모임 명을 “상영옥”이라고 지었다. 


드디어 지하 주차장이 있던 곳 근처에 다가왔다. 그 많던 단독주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모두 새 빌라로 바뀌었다. 막상 그 집이 없어지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위치를 대충 짐작해서 이쯤에 있는 집이 그 집이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봐 주변 집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만들어 놓았던 아름다운 꿈 조각들을 마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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