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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두 남녀가 건너면 사랑에 빠지는 다리

2014 Karlův Most, Praha, Czech

 서울에는 한강을 따라 많은 이름의 다리가 있다. 시간이 나면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다리를 바라보거나, 다리를 건너며 강가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유년시절,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한강대교를 건너며 느꼈던 이미지 무겁지만 부드러운 회색의 철골구조물, 그 사이로 반짝이는 물결과 햇살,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 덕분에 다리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다리 위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토로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떤 날에는 친구들과 함께 산 정상에서 그러하듯 큰 소리를 내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에는 홀로 강물을 바라보며 다리의 그 차가운 귓가에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기도 했다. 얼굴과 몸이 철골과 콘크리트 덩어리로 되어있어서 입이 무겁고, 조용히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다리 중 가장 낭만적인 전설을 지니고 있는 다리는 프라하의 까를교Karlův Most이다.

 까를교에는 "처음 보는 두 남녀가 함께 건너면 사랑에 빠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까를교를 건너면 마치 중세시대 배경의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연인이 이 다리를 건너게 되면 대략 오백 미터의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난간 위 살아 숨시는 듯한 30여 개 동상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며, 동시에 딱딱하게 굳은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열정으로 우릴 향해 축복해주는 걸 느낄 수 있다.


 나 또한 이 까를교의 전설을 직접 경험해서 그런지, 이 전설을 믿을 수밖에 없다.

 까를교를 만나게 된 것은 J,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를 우연히 만났으니, 까를교 또한 우연히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무모했던 건지 게을렀던 건지, 교환학생 신분으로 6개월 동안 체코에서 살아야 하는데도, 출국 전날까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변명을 해보자면 부모님께 지원받지 않겠다는 이상한 고집에 사로잡혀서 출발 전 주까지 돈을 모으느라 바빴다. 어떠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 짐도 출국 날 새벽에 쌌으니, 말 다했지 뭐.


 연착에 조금은 늦어진 비행기를 타고, 승무원이 준 세 모금 정도의 와인을 먹고 영화를 보다가 잠에 들었다. 비행기 속 조명이 깜빡이며,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서 잠에서 깨었다. 아마도 비행기는 땅과의 접촉을 위해 바퀴를 꺼내고 있는 듯 보였다. 창 밖을 바라보니 프라하의 밤도 나와 함께 지면으로 부드럽게 착지하는 중이었다.

 컨베이너 벨트가 오랜 시간 같은 곳을 맴맴 돌다가 드디어 내 짐을 뱉어냈다. 그 짐과 함께 나 또한 공항으로부터 뱉어지고 보니, 어느덧 밤이 쌓여있었다. 밤눈이 어두운 편이라 앞으로 내가 살게 될 브루노Brno로 어떻게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브루노는 제2의 수도로 프라하를 서울이라고 하면 대구 정도 위치한 도시이다.)


 거기다가 내 캐리어는 유럽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울퉁불퉁한 돌길과 싸우고 있었다. 캐리어 바퀴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불꽃을 튀길 것 같은 마찰을 내고 있었다. 결국 내일 아침이 밝으면 이동하기로 하고 근처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제서야 노트북의 전원버튼을 누른 후, ‘프라하에서 브루노 가는 법’을 검색한 다음 인터넷 창에서 짧아진 스크롤 바를 아래로 내리다 보니, 블로그 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블로그를 둘러보니, 블로그 주인은 나보다 한 달 정도 프라하 생활을 먼저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살려달라고는 할 수 없으니, 긴박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되도록 쿨해 보이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짧은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방금 프라하에 도착했는데, 혹시 브루노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밤이라 답장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십 분도 채 되지않아서 답장이 왔다.

 “오늘 도착한 거예요? 내일 터미널로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숙소가 어딘가요?”


 답으로 세 마디의 메시지 덕분에 걱정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었고, 다음날 깊은 잠에 빠졌다는 증거로 퉁퉁 부은 얼굴을 가지고 숙소 앞에서 블로그의 주인을 기다렸다. 

 여유가 생기고 나니 드디어 체코에 도착한 실감이 났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는 가슴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트램이 9월의 햇살을 뚫고 역동적으로 달려왔고, 그 옆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상인들이 분주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상하게 낡은 아이보리 색 건물에는 창가마다 붉게 핀 꽃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내 눈동자의 색도 묘하게 활기찬 그 붉은 색 빛으로 가득찬 것 처럼 느껴졌다.

 프라하의 붉은 풍경에 취해 잠시동안 멍-하니 서있는데, 저 멀리서 검은 점 하나가 다가왔다. 그 점이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오자, 단발머리의 여성으로 변했다. 

그리고 더 가까이 오자 여자는 내가 바라보던 풍경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자 친구의 바지를 뺏어 입은듯한 청바지와 하얀 니트 소재 긴팔의 소매를 성의 없이 살짝 걷어올렸고, 컨버스를 신은 여자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J라고 해요. 어제 연락한 분 맞나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연락드렸어요. 여기까지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내려가시기 전에 프라하 구경 좀 하실래요?”

 터미널까지만 안내받을 줄 알았는데, J는 프라하 가이드가 되어준다고 했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네. 그럼 오늘 잘 부탁드려요.”


 어제 묵은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그녀와 함께 프라하 구시가를 걸었다. 커피를 마시거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빛이 났다. 옆에서 말하고 있는 J의 머리칼도 반짝였고 눈이 부셨다. 어제는 불편했던 돌길마저 예쁘게 반짝였고, 매끄러운 돌길 위를 부드럽게 걷고 또 걸었다.


 “여기는 카프카 단골 집이고요, 여기는 체코 전통 케이크를 파는 곳이에요.”

 “천문탑은 매 시간마다 인형들이 나와요. 그때마다 인형을 보러 사람들도 몰려오는데, 사람들과 인형이 함께 어우러져서 그 공간 자체가 묘하게 귀여운 것 같아요.”

 프라하를 골목을 둘러보는 내내 J와의 대화는 어색함이 없었고, 그녀가 바라본 프라하에 대해서 듣는 것도 무척이나 재밌었다. 그녀는 나이는 어리지만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어른스러웠고, 구어체보다는 문어체에 가까운 말투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골목을 구석구석 돌다가 슬슬 질려갈 때쯤, J는 저 멀리서 작게 빛나는 한 건물을 가리키며 프라하성에 가자고 했다. J를 따라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인파가 많아졌다.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북적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듯 우리도 사람들 무리와 하나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횡단보도가 나타났고 어떤 무리는 멈쳐섰고, 어떤 무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였다. 


 J와 나는 멈춰있는 무리에 속해있었는데, 잠시 멈춰있는 동안 횡단보도 건너편, 첨탑 너머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쏟아져나오는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첨탑이 시야를 완벽히 막고 있어서 무엇이 있는지 강물의 냄새정도로 유추해볼 수는 있었으나, 정확히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의 눈 속에서 무언가가 올망졸망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굉장한 게 있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시간이 지나, 건너편 신호등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고, 횡단보도를 지나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는 첨탑을(과거에는 입장료를 내는 곳이었다고 하니 문지기가 맞는 듯하다.) 관통하고 보니 까를교가 나타났다.


 마음의 준비 없이 만난 까를교의 아름다움에 갑자기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옆에서 매력적으로 웃고 있는 J가 신경 쓰여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까를교 위에서 흰머리에 베레모를 멋들어지게 쓴 할아버지가 수준급 연주를 뽐내며, 관광객의 머리 위로 음표를 하나씩 올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이 재밌어 보였는지, 까를교 너머 프라하성과 주황색 지붕들도 관객이 된 것처럼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J와 나는 건너편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베레모 할아버지가 준 음표 하나를 짊어지고, 무용수처럼 춤을 추듯 다리 위를 걸었다. 다리 중간에는 소원을 비는 동상이 있어서, 꽤나 복잡한 절차*에 맞춰 ‘프라하에 꼭 다시 오게 해 주세요.’하고 소년 같이 소원을 빌었다.


 다리를 지나 언덕을 올라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프라하 성을 구경하곤, 지는 해와 함께 언덕을 내려왔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해보니 브루노행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J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에 저희 동네도 놀러 오세요. 오늘 가이드해주신 것처럼, 저도 좋은 구경시켜드릴게요.”

 “네! 오늘 재밌었어요. 잘 지내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안녕”


 브루노에 도착해서는 꽤나 바빴다. 이케아에 가서 냄비도 사야 했고, 밤에는 친구들과 파티를 하느라. 주말에는 이불 빨래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살짝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주말에 브루노 놀러 가도 될까요?”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한 문자를 시작으로 J와 나에게 이상하리만큼 로맨틱한 일련의 사건들이 많이도 일어났다. 까를교가 장난스럽게 부린 마법 덕분이었을까. 우리는 결국 사랑에 빠졌다.

 돌이켜보니 까를교는 그 무거운 무게만큼이나 묵묵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 같았다.

 처음 본 J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보러 프라하에 수도 없이 상경했으니 말이다.



꽤나 복잡한 절차*
 까를교 중간에 별 5개와 함께 빛나는 얀 네포무크Sv. Jan Nepomucký** 동상이 있다. 그냥 동상에 손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좋겠지만, 소원을 비는 방법이 따로 있다. 
 가장 먼저, 동상 아래 동판에 왼손을 올린 다음 난간을 보면 쇠심이 박혀있는데, 오른손을 올린다. 그 위치에서 바닥을 보면 쇠심이 하나 보일 텐데 쇠심에는 오른 다리를 올린 후, 이루고 싶은 소원을 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소원을 발설하지 않는다.


얀 네포무크Sv. Jan Nepomucký**의 전설
 동상의 주인공은 체코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원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주교였는데, 고해성사에서 외도를 고백한 왕비의 말을 다른 신하가 몰래 엿듣고, 왕에게 일러바친다. 왕은 얀 네포무크 신부에게 고해 내용을 밝히라고 명령하지만, 이를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왕이 신부의 혀를 자르고 몸에 돌을 묶어 블타바 강에 투척한다. 며칠 후, 강에서 머리에 다섯 개의 별과 함께 주교의 시신이 떠오르게 되어 왕은 사죄하고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된다. 무겁게 비밀을 지켜낸 이 주교는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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