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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esta Jan 27. 2021

방황하는 젊음의 러브 스토리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젊음이란 단어는 가능성과 열정의 상징입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만 주어진 삶의 황금기이고, 남은 삶 동안 그리워할 빛나는 시기이죠. 하지만 삶의 다른 모든 단계처럼 젊음도 그만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바라보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이란, 정착할 곳 없는 불안함을 안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꿈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는 마음속의 꿈이 현실과 부딪히며 마모되는 시기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젊음의 딜레마는 보통 성장 소설에 녹아 있지, 하루키 본인이 말한 대로 '일상적인 연애 소설'에서는 외면되는 것이 보통이죠. 『노르웨이의 숲』은 저자의 주장과 다르게 청춘의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는 않는 듯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제목이지만, 처음 출간 당시 우리나라에 이 노래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아, 이 책은 국내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들어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제목이 책의 분위기를 매우 잘 담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사랑보다는 오히려 상실감이 책의 척추를 지탱하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연애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가벼운 섹스가 너무 많고, 너무 깊은 방황을 하죠. 책을 읽어도 드는 느낌은 멜로의 달달함이 아닌, 어딘가 위안이 되는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또 이 책은 전반적으로 신비감이 스며 있습니다. 유별난 인물들의 독특한 행동, 특이한 장소 등 이색적인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옅은 신비감을 힌트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결말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죠. 하루키가 인물과 장소의 현존 가능성은 신경 쓰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무대 장치로써 인물과 공간을 넣어 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기 위해 제가 쓴 도구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메타포, 죽음, 섹스, 그리고 방황입니다.




삶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죽음


    이 소설에서 인물의 죽음은 죽음 뒤로 시간을 한번 건너뛴 뒤, 회상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죽음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피하고 죽음 전후로 바뀐 주변 인물들의 시각을 대비하는 것이죠.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 소설이지만, '심각해진다고 진실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라는 주인공의 말대로, 소설은 죽음을 일상적인 사건처럼 덤덤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주제는 소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이죠.


    시간적으로, 이 이야기의 시작은 기즈키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 기즈키와 나오코, 와나타베 세 명이 만든 세계는 조금 폐쇄적이긴 해도 평범한 학생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릴 적부터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만큼 긴밀한 관계였지요. 이 상황에서 기즈키의 죽음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와타나베의 삶의 큰 부분과, 나오코의 삶의 거의 전부가 한순간에 생명력을 잃은 것이지요.


    돌아오지 않을 일상, 사라진 기억을 견디기 힘들어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시간, 곧 어린 시절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즈키가 없는 상태에서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서로에게 어린 시절 (성인이 되기 전 시절)의 기억과의 연결을 돕는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즈키 사후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는 아직 과거의 기억에 갖는 향수, 혹은 미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적인 성공을 모두 다 가진 듯 한 사람, 나가사와 선배와의 인연은 『위대한 개츠비』로 시작하여 하쓰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소년 시절의 잡히지 않는 동경이라는, 독특한 이상을 상징하는 하쓰미 선배를 나가사와 선배는 모욕하듯 조롱하곤 합니다. 현실적인 성공이 어릴 적의 이상을 조롱하는 것이고, 결국 와타나베는 나중에 하쓰미 선배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가사와 선배와 연락을 끊습니다. 외적인 화려함에 희생될 수 없는 가치가, 나가사와가 평한 대로 '제대로 된 인간' 와타나베에겐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기즈키의 죽음으로 시작된다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것은 나오코의 죽음일 것입니다. 바로 곁에 미도리라는 생기와 매력을 갖춘 여자가 있음에도,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 사이에서 와타나베는 방황합니다. 이 방황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미도리와 대척점에서 나오코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미련, 책임 등을 짊어지기만 한 생기 없는 일상으로 나타나지요. 결국 나오코의 죽음과 장례 이후에 가서야,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찾게 됩니다.

 



이성의 품이 그리워질 때


    섹스는 생기와 욕망이 결합된, 활력적인 활동이자 들끓는 젊음에 있어 중요한 주제입니다. 반면 이 주제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청춘 시절의 의미를 상실한 섹스는 공허감, 허무함의 의미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상당히 감각적으로 묘사되지만, 외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아마 욕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기저의 공허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와타나베의 첫 경험은 고등학교 때의 여자 친구이고, 그녀는 소설에서 중요도는커녕 등장 비중조차도 한 페이지가 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에게 행위가 갖는 의미는 기즈키의 죽음이라는 더 큰 충격 안에 묻혀 버렸죠. 이런 무의미한 관계는 와타나베가 나가사와 선배를 만나며 증폭됩니다. 그의 능력을 빌어 처음 보는 이성과 몸을 섞는 것, 그는 '이성의 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고 하지만 스스로도 이런 행위에 환멸을 느낍니다.


    환멸감이 드는 무의미한 행위를 왜 계속하는 걸까요? 아마 의미가 있는 삶에 대한 회의가 깊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기 파괴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독한 회의주의자 나가사와 선배와의 만남이 행위를 증폭시킨 것도 설명이 됩니다. 삶에 대한 반발심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력의 상징인 섹스라는 행위에 공허감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 의미가 있는 두 번의 행위를 꼽자면, 하나는 당연히 나오코와의 관계입니다. 나오코가 스무 살이 되는 날, 그녀는 와타나베와 사랑을 나눕니다. 이는 나오코의 전무후무한 성 경험인데, 이전 남자친구 기즈키와 사랑을 나눌 수 없었던 이유는 둘은 한 몸이라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섹스는 타인의 사랑을 욕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행위 이후 나오코는 말과 행동을 잃고, 한동안 연락을 끊은 후 요양원에 들어가는데, 성행위를 성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본다면 나오코는 이 문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결국 이를 넘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시간은 흘러 가지만 성인의 관문을 넘지 못한 나오코가 좋은 결말을 맞을 가능성은 이 시점부터 희박해 보입니다.


    그녀의 불안한 상태는 그녀가 생을 끊을 결심을 할 때까지 지속됩니다. 그녀의 장례식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와타나베는 한동안 무계획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후, 레이코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례식을 치르고 그녀와 밤을 보냅니다. 나오코와의 관계가 그녀에게 관문이었다면, 이 관계 때문에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책임으로 묶이게 됩니다. 성인이 되기 전 소년 시절의 추억들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레이코와 나눈 사랑은 나오코, 즉 성인이 되기 전 본인의 삶에 대한 책임에 대한 해방의 의식이고, 우리는 레이코와 사랑을 나눈 뒤 미도리를 처음으로 간절하게 원하는 와타나베를 볼 수 있는 것이죠.




가방 하나 들쳐 메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기즈키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의 행선지는 도쿄였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변 누구도 기즈키의 죽음과 무관한데, 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을까요? 기즈키의 죽음 이후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심각하지 않은 일인 척'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라고 언급될 만큼 그의 세계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던 기즈키의 죽음이 가볍게 느껴질 순 없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식의 대응을 도피라고 합니다. 그는 익숙한 곳에서 마주할 스스로의 모습이 두려워, 도쿄로의 도피를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책 내내 서술자이기도 한 와타나베는, 앞서 언급한 인물의 죽음을 건너뛰는 서술을 포함해서, 글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피합니다. 젊음의 초입에서 고독과 공허에 몸부림치는 사람 치고는 너무 덤덤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심각하지 않은 척'의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삶의 의미를 남은 나오코에게 부여합니다. 그러니 나오코가 자살을 하고 나서, 혼자만 남았을 때 이를 견딜 수 없던 것이죠. 와타나베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상의 이야기인 영화를 미친 듯이 보고, 급행열차를 끊어 발길 닿는 대로 방황합니다.


    방황은 자신이 있을 곳을 분명하게 모를 때, 분명한 목표를 모르고 헤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와타나베는 항상 나오코를 향해, 미도리의 집을 향해, 요양원을 향해 이동합니다. 많은 상황에서 그는 찾아가는 역할을 하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는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 심리적으로 관계의 화살표가 와타나베를 향하는 경우는 잘 없는 듯합니다.


    이 화살표가 와타나베를 향하는 경우는 두 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대학 수업에서 그에게 말을 건 미도리, 그녀는 현실의 끈을 놓아버린 그에게 동아줄 같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나오코의 죽음 이후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찾아온 레이코입니다. 레이코와 나오코 역시 도피라는 주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요양원은 어찌 보면 도피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코의 죽음은 레이코에게 그녀의 남은 세계인 와타나베를 찾게 하는데, 이를 위해 요양원을 나오는 것이 레이코에게는 도피 끝에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행동이 됩니다.               


    또, 자신이 있을 곳조차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찾아오는 레이코는 방황을 마무리하게 하는 촉매가 됩니다. 누군가를 맞이하려면 어쨌든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니까요. 무기력하게 떠다니던 와타나베의 생활에 레이코가 나타나, 섹스로 상실되어버린 과거의 세계를 청산하는 의식을 치릅니다. 도피를 마무리하고 미도리가 있는 새로운 젊음의 일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죠.


    책의 결말에 와타나베가 '세상에 너 말고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미도리를 열정적으로 찾는 장면은, 앞부분의 건조한 서술과 대비되는 격정적인 표현입니다. 그의 도피는 끝났고, 미도리라는 목적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어디냐는 미도리의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방황을 마무리했지만 아직 자리를 못 잡은 모호한 결말, 이 소설이 연애소설이나 성장소설로 정의되기 힘든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 끝맺지 않았지만, 이 소설은 담을 것을 충분히 담은 채, 자신만의 감성으로 읽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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