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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늘이 Jun 01. 2019

왜 예술가는 비평가의 목소리에 떨어야 하는가

첼로의 언어

왜 예술가는 비평가의 목소리에 떨어야 하는가.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이 창조적 작업의 가치를 평가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이 창조적 작업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오스카와일드 는 몇 년간 예술학을 공부하며 욕지기가 나왔던 내 마음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창조 작업 경험이 전혀 없는 교수들 그리고 평론가의 길을 가려는 학우들이 피카소의 그림 하나 또는 어떤 이즘 하나를 두고 3~4시간 이상의 비평적 발표를 하고 논하는 광경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조각을 공부하던 십대 때부터 대학에서 작업을 하면서 현직 조각가들과 건축 조형물 작업 그리고 국가 재산의 복원 작업까지 20여 년간  예술을 하면서 술에 취해서  작업을 했던 날도 있다. 알코올의 기운과 상관없이 제작 과정에서 처음 의도했던 작품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호평이 따라오기도 했다. 정답은 없다. 수학이 아닌 예술에서는 말이다.  


400년 전 암스테르담에서 그림을 그렸던 대가 렘브란트의 작품 의도를 21세기 한 대학 강의실에서 어찌 운운하는 건지. 작품을 본 후 느낌 또는 각자의 필터로 얼마든지 해석하여  말할 수는 있다. 작품이 탄생한 시기 즈음 영향을 받은 이즘이나 미술사 배경등을 연결 지어 연구하는 건 좋다. 여느 <독서 토론>처럼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내며 더 깊은 토론을 이어가도 좋다.  


하지만 그 작품을 두고 무엇이 작가의 의도였는지 논쟁을 하는 모습이란. 선을 넘었다. 조물주도 예술가의 작품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거늘. 한마디로 창조할 수 없는 집단이 예술 작업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질투>가 나선가 싶다. 좋은 비평도 비판을 하는 비평도 <의견>이 되어야지 <정의>나 <역사의 사실>인 것처럼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마네와 모네도 나처럼 술에 취해 작품을 완성했을 수도 있고,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어떤 인물은 얼굴 표현이 꼭 다른 시대에 있는 것을 하나 갖다 붙이기라고 한 거 처럼 그린 <피카소>의 작품은 원래 그런 결과를 의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와 좋은 시간을 보낸 후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예술가가 처음 의도와 다르게 그리던 작품이 얼마든지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는 일이란 말이다.


작품에 그려진 <점> 하나를 가지고 작가가 그 점의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바닥에서 몇 센티를 띠었는지, 애초에 그림자를 그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등의 주장을 내세우며 언성이 높아졌던 날이 떠오르며 다시 욕지기가 올라온다.


피카소 아저씨가 백 년전에서 현재로 시간 여행을 오셨다가 당신 작품의 의도에 대해 엉뚱한 논쟁하는 수업을 엿봤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광경일까. 학점 잘 받으려고 끝까지 앉았던 나를 보셨을까 후회되네...


고로,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비평가의 목소리에 떠는 게 아닌 그들의 <의견>은 수용해주고 혹 손가락질을 하거나 <정의> 비슷하게 말하려고 하거든 <질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니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세상에 더 알리고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이 그들과 멀어져 마침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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