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율
한국은 스마트폰 세계 최강국이다. 과학 수사를 펼치는 경찰계에선 드론이 떠다니며 범인의 행적을 잡고, 영화판에서도 헬기를 대신해 촬영을 한다. 재미 삼아 고가의 드론을 여러 대 구입해 가지고 노는 키덜트족인 예전 스타트업 회사 대표도 기억이 난다.
AI(인공지능), 러닝머신, 로봇, 무인 자동차 테슬라가 세상에 나오고 있는 시대(국토부의 제작자 등록 등 인증 절차가 지연되어 한국에 출시가 늦어지는 테슬라는 오는 6월 예약자들이 차를 받는다.)에 사는 나는 5년 전 내 인생 최대 ‘사건’인 아기를 낳고, 눈으로만 즐겼다. 하루하루 커가면서 한 신기한 행동, 예상치 못한 말들.. 그 순간을 너무 혼자 즐겼다. 너무 어리석다.- 소중한 순간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아이폰을 들이댔다. 남편은 사진 찍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 찍는 그 순간도 눈으로 즐기라며. 나와 내 아이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미래에 기억이 나지 않을까 겁나고-모든 순간이 기억난다는 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딩동!
2011년 겨울에 태어난 <이뜬 율리(Ethan 율리(律利 법 률,이로울 리)>는 지금 5.5살이고 한국 나이 7살이다.
올해 3월, 지난 4년간 다녔던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겼다. 프리랜서인 나와 재익에게 약간의 사치로 <유료> 유치원을 보내는 거지만, 국가 보조금 100%로 다닐 수 있는 일명 <구립 어린이집>에 비하면 <천사의 집>이다. 눈에 띠게 업그레이드된 점심 메뉴의 변화를 봤고, 무엇보다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들을 봐주는 교사들을 보고 그동안 말이 늦게 트인 율율이 겪었던 <상처>가 조금씩 잊혀지길 바랐고, 잘 적응 중이다.
며칠 전 학부모 상담에서 담임교사와 오후 종일반 교사 모두 수차례 얘기했다. 율율이 정말 잘하고 있다고. 밥도 스스로(믿겨지지 않지만 믿고 싶어서 가만있었다.) 잘 먹고, 특히 질문이 정말 많다고. 가끔 한국어가 미숙해 뜬금없는 대답이나 말을 할 때가 있지만. (이건 차차 나질 거라 믿는다.)
만 4세가 될 때까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율율은 지금 보면 (한국말을) 안 한 거 같다. 말을 시키면 영어로 바로 답 했으니까. 한국에서 태어나고 어린이집도 다니고 우리 가족들도 모두 한국말을 할 테니 집에선 영어로만 소통하자고 <여기요> <직진> 등 몇 가지 단어만 말하는 12년 차 한국살이 중인 영국인 남편 재익이 부탁 같은 강요를 했다. 난 동의했고.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서 4년이 되도록 영어만 말하고, 만화 영화, 유튜브 시청 모두 영어로만 하더라. 자기 아빠를 유난히 좋아해서 그런지 아빠 껌딱지 율율은 아빠와 수다를 많이 하며 놀았다. 어린이집에선 서로 대화가 안되니 아이들과 갈등이 점점 벌어졌고 아이의 인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교사는 어느 기관의 리플릿까지 건네주며 <언어치료> 받기를 몇차례 강요했다. 학기 중 상담 땐 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대놓고 따돌림을 당한 사례도 마구 얘기하더라. 속상한 마음이야 말할 수 없었지만, 너무 부모 책임으로 몰아간 매사가 극단적인 그 교사도 싫었다.
율율이를 지금 유치원으로 인도해준 두 딸을 가진 고마운 어린 엄마는 율이 어린이 집에서 겪은 사례들을 들을 때마다 부르르 흥분하며 떨어주었다. 말 못 하는 아이들이 절대로 그런 취급을 받아선 안된다고. 반 친구들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놀지 않으려고 하면 교사는 그걸 그 아이 엄마에게 말하면서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설명해주고 같이 어울리게 도와줘야 한다고.
율율이 반 친구에게 맞거나(당시 율은 태권도로 다져진 건장한 아이이의 타깃이었다.) 그 아이가 율 머리 전체에 치약을 묻힌 <사건>에 대해서도 어린이집 교사는 <어? 저는 못 봤고요~>라고 말하며 집에서 부모님이 잘 지도하셔야 아이가 뭐가 옳고 그른지 알 것이고, 괴롭히는 친구에게 그건 나쁜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잘 지도하라며 일단락했다. 알고보니 어떤 사례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대처하는 교사였다. 원장에게 불만 접수가 수차례 들어와 교사 전체 회의도 열렸고, 한 엄마는 교사에게 부당하고 수치심을 받은 아이를 위해 남편을 대동하여 가서 따지기도 한 일을 나중에 알았다.
양쪽 집안 첫 손자로 태어난 율은 말은 잘 못 했지만(영어로는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고) 아기 때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인지 <Happy boy(해피 보이)>다. 반 친구들이 안 놀아주거나 맞고 온 날도 전혀 우울해하지 않았다. 율에겐 레고를 조립하는 게 훨씬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었고, 아빠와 온 에너지를 다해 몸으로 놀기, 내가 한글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들에 집중하는 걸 좋아한다. 고맙고 대견하고 다행이다. 재익은 자주 자고 있는 율에게 <Special boy>라고 혼잣말을 하며 대견해한다.
어린이집 교사에게 <언어치료>를 강요받은 후, 남편과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내심 걱정되고, 정말 인격 형성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언어치료 대신 다른 애들도 다 한다는 한글과 미술 수학 <방문 학습지>를 시작했다. 사교육을 최대한 줄기기 위한 방침으로 정부는 올해부터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게 할 거라고 발표했다. <한글을 모르고 들어가도 된다>에 휴우.. 일단 한숨을 돌려보지만, 내 친구가 키우는 조카 리암은 율과 같은 나인데 노래방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가사와 랩을 보고 신나게 노래를 하는 애다. 음.. 너무 차이가 나면 안 되니 한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많이 보라는 의미에서 학습지를 시작했고 4개월째다. 그제는 율율이 혼자서 노트에다 레고 상자 영어 제목이나, 내가 읽고 있는 책 등의 글자들을 따라서 <그리고>는 나더러 읽어보란다. 하하, 시키지도 않은 영어와 한글 문장 쓰기를 하다니. 또 대견하다.
다른 아이들이 레고 블록 가지고 놀 때, 율율은 이미 2-3살부터 작은 조각으로 된 <스타워즈 세트>를 아빠와 설명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같이 조립했다. 지금은 웬만한 큰 세트도 10분 안에 혼자 조립을 끝내고 또 새로운 레고를 조립하고 싶어 안달한다. -레고 회사 직원들이 부럽다. 예전에 회사 미팅에서 만났던 디즈니에서 일하는 분은 회사에서 나오는 온갖 장난감과 사은품 덕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1등 아빠 대접을 받는다고 우쭐함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율은 내 귀에다 <오늘 위켄드야?> 하고 속삭여 묻는다. 오늘은 금요일. 율이 매주 화, 금에 다니는 태권도에 가는 날이다. -이번 주 화요일은 못 갔다. 장염끼가 있어서 전날 밤부터 배가 아프다며 배를 쓸어달라고 투정하더니 결국 전날 (어렵게 한 시간동안)먹은 저녁을 다 토하고는 <유치원에 전화해서 내가 토하고 아프니까 못 갈꺼같다고 선생님께 전화해줘>하는 거다. <손가락도 아프고, 마음이가 아프니까 '호'도 해줘> 해서 원하는 대로 '호'도 해주고 병원도 가고 죽도 만들어 먹여줬다. 그날은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저녁에 태권도 갈까 물었더니 <아니>하고 단호한 입장을 보이더라.
율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엄마 오늘 위켄드야? 스쿨데이야?>를 물어본다. 주말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한참 놀다가 자고 있는 아빠에게 영국 악센트로 <Jake~This is the weekend so I can watch iPad yes? Please~~~> 하고 아이패드 보기를 허락 받으려 최대한 애를 쓴다. 아빠가 <Sure> 하면 <YES!> 하고 혼자 파이팅 포즈를 하고는 나를 깨우고 아침으로 팬케익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오늘 아침 율율은 어제 저녁에 나와 그리던 자기 얼굴을 완성하느라 또 먹는 건 뒷전이었다. 유치원 버스 시간을 못 맞출까 봐 오물오물 시리얼을 씹으며 그림을 수정하고 있는 이뜬얼굴에 재빨리 부엌 싱크대 수돗물을 틀어 내 손으로 물을 묻혀 세수시키고, 도망 다니는 아이를 따라 뛰다가 잡아서 겨우 얼굴에 로션을 발라줬다. (왜 로션을 바를 때마다 그렇게 도망을 가거나 숨을까?!) 먼저 밖으로 나간 아빠를 쫓아 급하게 신발을 신고 스쿠터(킥보드)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가던 아이는 돌아서서 나에게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날려준다. 두 번째 하트를 날릴땐 윙크 비슷하게 눈도 움찔한다. 아훟~ 아빠 껌딱지 율율이 급히 아빠를 따라 나가면서도 잊지 않고 내 신문도 휙! 던져주고, 하트도 두 번이나. 휙! 휙!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