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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Sep 21. 2020

이동목욕센터

꾹 참고 그냥 할 걸 그랬지

 공익시절 나의 근무지는 이동목욕센터였다. 욕조를 비롯한 목욕시설이 설치된 탑차를 타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직접 찾아가 목욕을 시켜주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목욕을 시켜준 사람은 하반신이 마비된 노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동목욕차가 오는 날이 아니면 씻을 일이 없는 만큼,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숨을 참으려 애쓰며 짝을 이룬 나이든 봉사자를 도와 노인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벗겨낸 속옷에 묻은 걸 확인한 순간, 이후 10년 동안 한 번도 재현해보지 못한 번개같은 속도로 목욕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밖에 있던 팀장은 재빨리 날 붙잡아 제지했다. 아무래도 비슷한 일을 한두 번 겪어본게 아닌 것 같았다. 못 하겠어요, 도저히 못 하겠어요! 그녀는 능숙한 태도로 거의 발광을 하는 날 달랬다. 치킨 좋아하니? 오늘 첫날이니까, 끝나고 환영식으로 치킨 먹자.


 팀장은 능수능란한 어르고 달래기로 빠져나갈 모든 구실을 격파했고 나는 결국 목욕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때수건 끼우고. 팔부터 시작하자. 봉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귀가 어두워 바깥에서 있었던 소란은 듣지 못한 건지, 그저 생기없는 눈으로 어디랄 것도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윗니와 아랫니가 맞닿을 만큼 세게 입술을 깨문채 다른 사고 없이 첫목욕을 마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휠체어에 앉은 노인은 여전히 촛점 없는 눈으로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말했다. 고마워요... 그날 처음 들어본 그의 목소리였다. 난 마치 큰 은혜라도 베풀었다는 듯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사자가 휠체어를 밀고 돌아서기 직전 노인은 무어라 한마디 덧붙였다. 그것이 '미안해요'라는 말임을 그 땐 애써 모른 척 했다.


 입에 있는 걸 미처 다 씹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치킨을 코밑에 들이밀던 팀장 덕분인지, 한 달 쯤 지나니 치킨 없이도 일에 익숙해졌다. 속으로야 불평불만이 넘쳐났지만 더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휴전선 철책을 순찰하거나 사람보다 무거운 탄약 상자를 나르거나 자유무역협정에 분노한 농민들의 죽창을 막아내는 친구들에 비하면 편한게 사실이니까.


 나는 곧 노인들을 목욕시키는 모든 과정에 통달했고, 겨울에 호스가 얼어붙거나 욕조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리프트 기계가 고장나거나 하는 비일상적인 돌발상황에도 순조롭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나중엔 노인들과 제법 농담도 주고 받으며 '재미진 총각'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도 얻었다. 몰라보게 멀쑥해져서 돌아가는 노인들의 뒷모습에 꽤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내 몸도 이렇게 깨끗하게 안 씻는데... 내 혼잣말에 팀장이 깔깔 웃었다.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무사히 소집해제 후 예비군까지 끝난 아저씨가 됐다. 휴전선을 순찰하거나 탄약 상자를 나르거나 죽창을 막아냈던 친구들은 아직도 가끔 군대 꿈을 꾼다는데 난 그런 경험이 없다. 어차피 그 때 목욕시킨 노인 대부분은 얼굴도 잊은 지 오래다.


 다만 내가 처음으로 목욕시켰던 노인만은 지금도 종종 생각날 때가 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과 촛점없는 잿빛 눈동자.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꺼낸 고맙다는 말이 방금 전 겪은 듯 생생하게 떠올라 내 마음의 안쪽을 할퀴는 듯 하다.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직도 철들 날 요원한 삼십대의 나는 그런 나보다도 철없는 이십대의 나에게 당부하고 싶다. 웬만하면 꾹 참고 그냥 하지 그래? 불쌍한 노인네잖냐. 물론 이십대 나는 항변할 것이다. 거참, 불쌍한 건 강제징용 당해서 시급 천원도 못받고 일하는 나지. 안 그래도 억울한데 남의 똥빤쓰까지 벗겨야 돼?


 진정해.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냐. 네 인생 오직 너만을 위해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대신 언젠가 네게 힘든 날이 올 때, 고통과 슬픔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견뎌야만 할 때, 견디다 못해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만큼 막다른 길에 몰린 간이라 해도,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 손 내밀어주길 기대하진 말라고. 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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