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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Sep 28. 2020

희망없는 희망근로

또 공익 때 이야기


 팀장님 어디 가셨어? 본관? 팀장 본관 갔어? 그럼 난 가도 되겠네. 안 돼? 왜?


 그러니까 팀장이 나 제 시간에 퇴근하는지 감시하라 했다는 거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거구만. 자기만 눈감아주면 되잖아. 나 오늘 바쁘거든. 어차피 팀장은 본관 한 번 가면 함흥차산데. 거참, 알았어. 팀장이나 그 밑에 공익이나 쌍으로 융통성 제로네.


 그럼 난 여기 있어야겠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왜, 나랑 있는 게 싫어? 아니긴 표정에 다 나와 있는데. 원래 표정이 그래? 그럼 안 되지. 나름 서비스직인데. 공익 표정 칙칙하다고 구청에 민원 들어가겠다.


 물어볼 말이 있는데. 저 쪽 아줌마 어때? 나랑 같이 일하는 여자 말이야. 뭐? 저게 어딜 봐서 착해?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자기도 세상 공부 다시 해야겠다. 얘는, 또 싸우긴. 누가 들으면 우리가 만날 싸우는 줄 알겠네. 하여간 난 그 아줌마 맘에 안 들어 죽겠다니까. 완전 또라이야, 상또라이. 같이 있으면 나도 또라이 되겠다니깐.


 들어봐. 그 아줌마랑 나랑 노인네들 씻겨주잖아. 비누칠을 하고 그걸 헹구면 수건으로 닦아줘야 하잖아. 뒤에서 수건 꺼내다가 보면, 이 아줌마가 노인네한테 또 비누칠을 해요. 왜긴 왜야 또라이가 알람 맞춰놓고 또라이짓 하나. 치매 오는 건 10년 전부터 조짐이 보인다던데 그건가 보지. 하여튼 내가 지금 뭐하냐고 그러면 흠칫하더니 마사지 해주고 있데.


 허 참, 나도 목욕탕에서 때밀이 한 적은 있지만 이태리 타올이랑 비누로 배 마사지 한다고 하는 건 살다살다 그 미친년이 첨이라니까. 그냥 깜빡하고 비누칠 한 번 더 했다고 하면 누가 잡아먹어? 꼴에 또 지 잘못은 죽어도 인정을 안 해요. 언제 한 번은 노인네 다 씻기고 옷 입히려는데 샴푸 거품 남았다고 말린 머리에 다시 물을 뿌리는 거야. 알고 보니까 흰머리를 거품으로 본 거더라구. 나 참, 대가리만 빠가인줄 알았더니 눈깔도 병신이야!


 응? 화난 건 아냐. 내가 원래 목소리가 좀 크잖아. 물론 난 이해하지. 말 안해도 알어. 나이 든 사람이니까 이해해. 근데 그러면서 조잘조잘 주둥아리질은 어쩜 그렇게 쉬지도 않는지 몰라. 우리 일이 씻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혼자 사는 노인네 말 들어주는 일이기도 하잖아. 근데 노인네들이 말할 틈이 없어요. 하루는 우리 아들이 내일 라식 수술을 하는데 라식 수술이 뭔지 아느냐. 다음 날은 우리 아들이 오늘 라식 수술을 하는데 라식 수술이 뭔지 아느냐. 그 다음 날은 우리 아들이 어제 라식 수술을 했는데 라식 수술이 뭔지 아느냐. 아니 누가 그까짓 거 알고 싶대? 노인네들은 맨날 바뀌기라도 하지 난 맨날 똑같은 얘기만 듣다보니까 아주 돌아버려.


 그래서 시끄럽다고 한마디 한 거 가지고 눈물을 뚝뚝뚝뚝 흘리면서 지 아들이 잘 나간다고 시샘해서 괄시를 한다는 둥 어쩌구 저쩌구... 아니 눈깔 뚜껑 열어서 레이저로 긁어내면 그게 잘 나가는 거야? 솔직히 아들이 잘 나가면 용돈 받아 놀기나 하지 그 나이에 이런데 와서 노인네나 씻기겠어? 나야 뭐 자식 다 크고 할 일 없으니 심심해서 봉사도 할 겸 용돈도 벌 겸 하는 거고... 어쨌든 그러고 나면 팀장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는 거야. 자기도 몇 번 봤지? 나만 나쁜 년 되는 거지 뭐.


 자기가 말 안 해도 다 이해한다니까. 내가 요즘에 뭐 그 아줌마한테 시비 걸거나 싸운 적 있나? 이젠 다 이해하기로 했어. 그냥 답답해서 한 번 말해보는 거야. 근데 들어보니까 팀장이 우리 맨날 싸운다고 둘 다 잘라버리겠다고 했다며? 어떻게 알긴 우린 다 안테나가 있는데. 혹시 자기 알면서도 나한테 말 안 해준 거야? 농담? 세상에 그런 농담이 어딨어. 농담이든 진담이든 그런 얘기를 내 귀에 들어오도록 한 게 우선 잘못이지.


 걔도 아주 웃긴다니까. 나이도 어린 게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뭘 알어? 팀장입네 하면서 턱 끝으로 누구 부려 먹을 줄이나 알지. 솔직히 자기도 기분 나쁘지 않아? 아니긴. 얘는 뭘 물어보면 맨날 아니래. 팀장 귀에 들어갈까봐 그래? 가만 보면 자기도 엄청 소심하다니까. 에이형이지? 비형이야? 이상하네. 그런 거 안 믿는다고? 비형 맞구만. 비형은 혈액형 안 믿거든. 나? 나도 비ㅎ... 밀. 비밀이야. 여자의 몸무게랑 혈액형은 함부로 물어보는 게 아니야. 어떻게 남자가 여지껏 그런 것도 몰라. 죄송할 건 없고. 앞으로 여자친구 만나면 걔한테나 잘 해주면 되지.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그래, 팀장. 까놓고 말해서 걔가 뭘 알어? 지가 열여섯에 애를 낳아봤어 그 애 업고 길에서 떡볶이를 팔아봤어.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는데 다 뒤엎어서 피곤하게만 하지. 다음 주엔 문서 정리까지 나보고 하래. 내가 무슨 급사야? 이런저런 잡일은 다 떠넘기려고 든다니까. 이 팔 좀 봐. 모르겠어? 퉁퉁 부었잖아. 자세히 봐봐. 맞지? 부었지? 그런 것도 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부었다니깐. 지난번에 갑자기 대청소한다고 해서 수세미로 바닥 문지르다 접지른게 아직도 안 나았어. 나을 틈이 없지 그렇게 잡일을 시켜대는데. 그래서 말인데, 나 문서 정리 할 때 좀 도와줄 수 있지? 뭐? 자기가 나 도와주는 건데 왜 팀장한테 물어봐? 입장? 공익한테 입장이 어딨어 강제로 끌려온 건데.


 하여간, 요즘엔 다 맘에 안 든다니까. 내가 뭐 갈 데가 없어서 이런 데서 일하는 줄 아나. 자기도 요샌 팀장 쪽에 붙어서 앞잡이나 하고 있고. 입장? 그 놈의 입장. 공익질 하기 편하겠수. 물론 개인적으로는 자기 좋아하지. 얼마나 착해 예의도 바르고 싹싹하고. 입도 무겁지? 그치? 부끄러워 하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얘기하다 보니까 늦었잖아. 나 오늘부터 동사무소 하모니카 교실 나가거든. 왜냐니, 나는 하모니카도 배우면 안 돼? 그냥... 옛날에 하모니카를 정말 잘 부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 땐 우리 부모도 살아있고 하숙 치면서 그냥저냥 살았었어. 그 때 우리 하숙집 살던 오빠였는데, 생긴 건 갑돌이처럼 생겨서 하모니카는 또 기가 막히게 불었어. 나한테 하모니카 가르쳐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지금은 완전 할아버지 됐겠네. 모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깟 자식 이제 와서 알게 뭐야.


 하여간 열여섯살 아무것도 모를 때 어떤 놈팽이한테 속아서 줄줄이 애들 낳고 다 키우고나니까 이렇게 됐네. 누구긴 누구야 애 아빠지. 지금 병원에 있어. 첫째 젖 떼기도 전에 사업한다고 지랄하다가 말아먹고 술만 처마시더니. 냅둬 남의 집 가정사잖아. 그 놈은 한참 더 가둬놔야 돼. 그래야 인간 되지.


 혹시나 해서 말인데, 누구한테 나 하모니카 배운다는 소리는 하지마. 왜긴 왜야. 그냥 하지마. 자기한테만 말해주는 비밀이니까. 나 이제 가야겠다. 거 봐, 팀장 결국 안 왔잖아. 벌써 그렇게 꽉 막혀서 어쩌려고 그래. 나 간다. 다음 주에 봐. 비밀 잘 지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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