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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Sep 30. 2023

차례

제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살이는 얼핏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을 포함해도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적지 않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남성여성 할례 의식은 제한된 자원을 가진 상황에서의 원시적 인구조절 방식이었고, 형사취수나 일처다부제는 잦은 전쟁으로 발생하는 미망인과 어린 자녀를 위한 복지 시스템이자 성비 불균형의 해결 방식이었을게다. 고려인들은 눈앞에 닥친 말탄 유목민을 팔만대장경 편찬으로 증명되는 불심으로 해결하려 드는 똥멍청이였던 것이 아니라, 불교 국가인 고려 각지에 흩뿌려진 사찰을 중심으로 피난민 집결과 행정력 수복, 구휼 등을 꾀했던 것이라 보는게 옳을 것이다.


 차례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죽은이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임을, 같은 조부모를 가진 사촌지간임을, 같은 증조부모/고조부모를 가진 육촌/팔촌지간임을 새삼 재확인 하는 것은 머릿수가 곧 생산력이었던 농경사회, 그것도 특정한 시기에 거대 규모의 노동력이 집중되어야만 하는 쌀 농사 문화권에서는 어쩌면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을게다.


 많은 집안의 차례와 제사에서 보이는 숨막히는 권위주의도 결국은 집단의 유지력을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헛기침 소리만 내도 나중에 혼났던 어린 시절의 제사와, 할머니의 작고 후 흐물흐물 흥청망청 테레비도 끄지 않고 제사를 지냈던 소년기, 그리고 지금은 아예 제사를 지내지도 모임도 연락도 없는 우리 집안을 되짚어봐도 그렇다.


 변해가는 삶의 방식에 따라 결국엔 사라져버릴 것이라 해도, 그 가치가 바닥을 치고 있는 '가족'이 공통의 기억을 새삼 되살리는 모습은 그래도 아름답다 말하겠다. 그러나 줄자로도 저울로도 측정할 수 없는 '정성'이란 것을 눈에 보이게 내보이겠답시고 살아있는 사람의 노고를 쥐어짜는 것은 눈앞의 난관을 불심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 이상으로 어리석다. 모두를 이해시킬 시간이 없어 까라면 까라고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관습화를 선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관습이 요구하는 손해가 관습을 지켜서 얻는 실용적 이득을 추월한다면 그것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해당 전통을 가장 오래 지키고 있는 유교 위인 종가집의 차례상이 질박함으로 유명하다는 것이야 주지의 사실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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