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종종 그것이 바로 한국인 특유의 크랩멘탈리티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남들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잘 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역겨운 근성이 우리 집단 고유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나라라는 공동체로부터 받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많으면서도,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등 공동체 전체에 위기가 생겼을 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단결하는 고귀한 품성이 이 집단의 특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이 둘 중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며, 또 둘 다 파편 같은 진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나의 가설은 쌀농사 문화권이라는 것, 더불어 한반도라는 쌀농사의 북방 한계선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의 결합일 확률이 높다.
강화도였는지 김포였는지, 세계 최초의 쌀재배의 흔적이 한반도에 있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에는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첫번째일리 없고 (태초의 한반도에는 야생벼가 자생하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첫번째라 한들 그게 딱히 자랑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내가 김포에 집이라도 있었으면 자랑스러운 척, 적어도 믿는 척은 할 것이다. 그게 다 브랜딩이니까. 하여간에 중요한 건 역사의 초기에 쌀농사가 도입됐다는 사실이다. 삼모작 사모작도 가능한 보다 남쪽 지역에 비해 혹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다른 농사는 더 병신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5대 곡물 중 쌀말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을 밀만 해도,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격과도 같은 밀가루 보급으로 그 가치가 추락했을 뿐 본래 종갓집 제삿상에 국수가 올라갈 만큼 귀한 곡물이었다. 아마 이 좁아터진 땅에선 쌀에 비해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쌀농사는 그보다 나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지 선택은 아니었다.
초기 쌀농사는 대부분 볍씨를 직접 뿌리는 작파법이었다.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은 산출량이 우수한 대신 일 년 강수량 대부분이 장마철에나 집중되는 이 땅에서는 굶어죽을 위험이 너무 컸다. 치수 사업이 가능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 즉 조선 출범 이후에야 이앙법이 대세가 된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이앙법의 첫번째 단점이 바로 농업용수가 엄청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대에는 나름 선진적이었는데 너무 선진적이어서, 그러니까 기록이 너무 많아서 지나치게 평가절하 받는 조선 행정부가 열심히 저수지도 만들고 보도 세웠겠지만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있다. 단순히 부럽고 말게 아니라, 본래 내 논에 들여야할 (수)자원이 줄어든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진단 결과 원인불상 상세불명의 복통이 일어날만 하다. 그러고보면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시골에서 논에 물대는 문제로 칼맞고 낫맞고 하는 일이 흔했다고 하니 도리어 배만 아프고 마는게 온건하지 않은가 싶다.
이앙법의 두번째 단점은 노동력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어불성설이고 한 집안 내의 모든 가용 노동력을 투입해도 어림없다. 호의로 사든 계약으로 사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대부분 다량의 호의를 곁들인, 똑같이 노동력으로 되갚기로 하되 법적인 효력은 없는 느슨한 계약으로 샀을 것이다. 계약의 이행을 법이 아닌 이웃들의 시선으로 감시했기에 이 나라 특유의 눈치 문화 또한 발달했으리라.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결핍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위기에 단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누구 말처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유독 도덕적이고 멸사봉공의 고귀한 정신을 가져서가 아니다. 지리적 환경적 특성이라는 필터가 걸러낸, 유전자에 새겨진 수준의 생존 방식일 뿐이다. 자책하거나 욕할 것도 없고, 자랑스러울 것은 더더욱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위의 내용은 전문가도 아닌 내 그냥 가설이다. 살면서 이것저것 주워읽고 주워들은 것을 종합했다. 틀릴 수도 있다. 아마도 완전히 틀리진 않겠지만, 훨씬 큰 지분을 가진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어휴, 이 나라 새끼들은 천박해서 남 잘 되는 꼴을 못 봐, 라든가 혹은 와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동체의 가치를 알고 지키고자 하는 훌륭한 품성을 가졌어요, 하는 등의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틀리거나 가설에 머물고 말지라도 현상과 사건의 이면을 통찰하려는 노력과 태도가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삶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오늘의 추천 도서, 홍대선의 <한국인의 탄생> 독후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