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할머니 탓
할머니는 슬하에 팔남매를 뒀다. 한 번은 월남에 간 넷째 아들이 미제 물품을 잔뜩 보내왔다. 이미 전쟁을 겪은 세대인 만큼 대부분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커다란 깡통에 가득 들어찬 검은 가루만은 정체불명이었다.
깡통 옆면 꼬부랑 말 사이에 끼어있는 그림을 봤을 때, 우선 물에 타야한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미싯까루 같은 것인가? 길어온 우물물에 두어 숟갈 타서 휘휘저으니 그럴듯한 색깔이 나왔다. 한모금 마셔보니 켁 소리가 나며 얼굴이 다 일그러질만큼 쓴데, 또 입안에 남은 맛은 알 수 없는 구수한 향을 풍기는게 아닌가.
옳거니, 이것은 바로 양놈들 먹는 보약이로구만.
그 후 아비와 그의 형제들은 아침마다 냉수에 커피 두 숟갈을 탄 (장남은 세 숟갈) 것을 한 대접 씩 마셔야 했다. 시대가 달라도 그래도 챙겨주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들 불평은 다를 바 없었다. 허나 모던-마더-ㄹ와 할머니의 다른 점이 있다면 화가 나면 장작패는 도끼를 휘두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휘둘렀다고 한다. 아비와 형제들은 잠자코 투정과 함께 프림도 설탕도 없는 냉커피 한 사발씩을 삼켜야만 했다.
밤에 도무지 잠이 안 오는 걸 보니 보약이 맞긴한가보다는 형제들 중 누군가의 발언은 그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통하는 농담거리가 됐다. 예의 일화의 영향인지 아비와 형제들은 죄다 커피 중독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다. 작고한 큰아버지들의 제삿상엔 지금도 커피가 올라간다.
고로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서야 두뇌 활동이 시작되는 내 생활습관도 꼭 내 탓만은 아니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