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른 새벽. 눈을 떠도 공기로 알 수 있는 이른 새벽이었다. 알람이 울리기엔 시간이 남았고 눈을 감기에는 애매한 시간. 벌써 기계적으로 생활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 양손으로 침대를 짚고 몇 번을 허우적거리고선 침대를 벗어났다. 확실히 수면의 질은 좋아진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은 5시를 좀 넘어 가리키고 있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크게 숨을 들이켜다 멈칫했다.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가로등 불빛을 흩뿌리는 미세먼지 가득한 바람과 눈이 마주쳤다.
“퉤. 퉤. 퉤.”
미세먼지를 들이마신 사실을 육성으로 부정했다. 세 번이면 충분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중요하진 않았다. 씻는 시간을 생각해도 30분이나 남았다.
창문 앞에 놓인 커다란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에 앉았다. 크기로 따지면 스타벅스 매장 가운데 놓인 콘센트가 연결된 원목 테이블과 유사했다. 사람이 8명이 너끈히 앉을 수 있지만 마주한 자리를 비우느라 4명만 앉는. 당연히 호텔 투숙객에게 주어진 원목 책상이 훨씬 본새 났지만 말이다. 책상 하나만으로 방안을 고급짐으로 메워 주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업의 회장님께서 가운을 걸친 채 와인을 마시며 신문을 넘기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특히 원목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나뭇결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중국 출장의 가장 큰 혜택이었다. 몇 달이나 되는 기간을 호텔에서 재워주고 방에 이런 고급스러운 책상이 있다니. 여러모로 책을 챙겨 온 과거의 나를 치하해야 했다. 최근 책을 읽는 것에 한참 취미를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내 방에 새 신을 신은 것처럼 펄쩍거리며 뛰었었다.
여행용 가방에는 여러 권의 책이 있었지만, 손에 잡힌 책은 두 권이었다. 다산 선생이 집필한 ‘목민심서’와 충무공께서 집필한 ‘난중일기’였다. 애국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위국헌신하겠다는 자세로 살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타국에서 선조의 기록을 짚어본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장 큰 의미는,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의 스토리텔링이 된다는 것이었다. 목적이 악하지만 않다면 책을 읽는 동기로서 충분하지 아니한가. 그 외 두 책을 고른 이유도 있었다. 목민심서는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 짬 날 때마다 읽을 수 있다는 점, 난중일기는 남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흥미로움 때문이었다.
30여 분 남은 시간 동안 목민심서를 펼쳤다. 옛사람들의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뿐더러 실제로 지켰을까 싶을 만큼의 청렴함을 관리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다만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읽는 이유는 나에게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을 잡기 위해서였다. 우연이라기엔 기가 막힌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싶었다. 보통 해외 출장은 부서의 신입사원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팀장의 갑작스러운 지시로 가게 된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출장자로 정해진 당일에 여행용 가방에 담을 리스트를 정리하며 출장을 준비했다. 해외로 떠난다는 설렘은 없었다.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상황에 내려온 동아줄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나의 첫 부서장이 해외 출장을 지시했고, 그 부서장은 신입사원 면접관으로 만났던 구면이었으며, 면접 때 교육업을 준비했던 스토리를 듣고서 경영수업을 준비했냐고 했을 만큼 호평을 해주었던 사람으로, 부서 배치 후 마주쳤을 때 했던 말이 ‘너도 나 기억하지?’였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와의 마찰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럼 면접자가 면접관과의 합이 좋을 확률과 그 면접관이 부서장이 될 확률, 그리고 그중 부서장이 면접자를 기억할 확률에 마침 발치의 위협으로부터 떨고 있는 신입사원을 구제해줄 확률은 도대체 어떤 우연히 겹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 당연히 하나의 상황을 과장해 해석하는 중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늘의 두꺼운 비구름을 헤집고 내려오는 한 줄기의 빛은 받아들이는 감사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기엔 과분히도 따듯했다.
한국에서 품었던 빛을 간직하는 데는 목민심서가 큰 도움이 되었다. 타지의 새벽 6시에 호텔을 나서 밤 11시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하루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심신을 수련할 것이 필요했다. 오후 7시가 넘어가면 사내 메신저가 활발해졌다.
A : 오늘 조용한데? 바로 퇴근인가?
B : 되겠냐?
C : 무슨 중국에서 매일 한식을 먹어?
D : 그냥 회사 식당에서 밥 먹으면 안 되나...
B : 걍 노답이야, 뭘 알면서 그래?
E : 그래도 오늘 미세먼지 심하던데 삼겹살 딱 아닌가?
B : 인자한 듯이 웃으면서 “오늘은 내가 쏜다!”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재수 없어
A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 : 아 그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 : 그땐 저 좀생이가 미세먼지를 하도 처먹어서 헛바람이 들었나 했지.
E : 삼 분의 일인가 내고 웃으면서 “오늘은 내가 내니깐, 나머지는 너희 갹출해” 할 때 대박이었지.
D : 쟤 일어난다. 모니터에 얼굴 박아
E : 미안, 나는 오늘 빠질게~
C : 와 치사해, 삼겹살 먹고 싶다면서요!!!!!!!!!!!
B : 선배, 혼자 살려고요? 나ㄷ
메신저 방에서 거론되는 악의 축이 B 선배 쪽으로 다가갔나 보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아주 흥미로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 회식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다들 회식을 위해 일어나며 시끄러운 눈빛 교환을 했지만, 삼겹살을 좋아하던 E 선배만이 유일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악의 축이라고 불리던 출장지의 부서장은 신입사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일을 배우기에 좋은 상황이었다.기본적으로 한국에서보다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업무의 양은 많았다. 대게 그것들은 선배들의 몫이었고,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서 하던 일과 유사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는 떨어졌지만, 혼자서 진득하게 고민할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었다. 기계적으로 하던 일에 근본적인 물음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선배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매일 팀워크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한국식당에서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저녁 시간을 포함해 이와 유사한 일상의 모든 것들에 모두 지쳐있었다. 정작 본인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 더욱더 얄미웠다. 물론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중국 부서장의 시각이 배제되긴 했다. 단순히 선배들의 불평만 들어왔고 많은 상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짧은 식견으로의 바라본 시선일 테지만, 리더의 중요성을 매일 체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깐깐한 기준으로 기술되어있는 목민심서를 읽었다. 좋은 관리, 좋은 리더에 대해 읽어가며 반면교사를 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매일 아침 마음속에 쟁여둔 빛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목민심서를 덮고선 원목 책상의 한켠에 목민심서를 내려놓았다. 이미 신선함을 잃어버린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갑자기 실소가 나왔다. 시간이 지나며 로맨틱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상황의 민낯이 기억났다.
‘너도 나 기억하지?’를 들었을 때 표정은 분명
‘누구세요?’였다. 혹시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지인일까 라는 생각까지 닿았었다. 그러다 면접관이었음을 직관하고서야
‘네, 잘 지내셨습니까.’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래 면접 봤을 때랑 같은 에너지라 보기 좋네.’라고 웃으며 ‘누구세요?’라는 표정으로 맹하게 쳐다본 당돌한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친절히 구면임을 짚어주던 배려였지만, 확실히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