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시작하려니 늘 그렇듯 고민에 잠깁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소재와 구성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더라고요.’ 라는 식으로 말해보면 그럴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고민은 인사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안녕하세요 주니님'이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해 오고 있더라고요.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말입니다. 한 시간이 넘게 어떻게 색다른 인사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주니님이 주셨던 편지 말미에 있는 '변화'라는 단어가 맴돌더라고요.
회사에서 사용하는 모바일 메신저를 켜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주로 이 세 문장으로만 인사를 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상사나 선배의 경우 가끔 느낌표를 붙여주는 건 기본이고 말이에요. 제가 속한 조직은 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팀원 중에서도 7년째 막내를 담당하고 있고요. 아마도 주로 느낌표가 붙은 대화를 많이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팀으로 입사한 후배이자 동생과의 대화는 당연히(?) 모습이 다릅니다.
우선 대화에서 ‘과하리라 생각될 만큼의 활기참’을 볼 수 없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느낌표, 물음표가 가득하거나, 모든 문장이 종결형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신경 쓰던 대화가 아니더라고요. 오랜 기간 손에 붙어버린 화법이 어디 가겠냐마는, 감정이 결여된 단어 위주의 짧은 대화를 하는 겁니다. 인식한 상태로 메신저를 훑어보니 스스로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후배를 대할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책읽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도전했던 건 '고전문학' 읽기였습니다. 같은 에너지를 쓴다면 남들이 다 봤다는 책을 읽고 싶더라고요. 왠지 고전문학 정도는 읽어줘야 '독서 좀 하는 녀석'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내용이 이해가 잘 안될뿐더러, 주인공의 감정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또, 문체는 왜 이렇게 난감할 정도로 복잡한지 책이 넘어가질 않는 거예요. 이십 대 중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땐 현대소설 위주로 책을 읽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고전문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완독한 책이 '데미안'이었습니다. 이전에 네 번 포기했던 책이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첫 장을 펼쳤습니다. 두 시간 반정도 지났을까요?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책 중간중간 닭살이 올라오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작품을 평가할 수준이 되어서가 아니라, 데미안의 행동에서 공감되는 수치스러움이 올라와서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깨달음을 말씀드리기 앞서 삶의 철칙처럼 안고 있는 여러 문장(드리의 개똥철학)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자 합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면 우선 먹어보자', '먹은 뒤에 후회는 하지 말자', '단, 똥이라 확신이 들면 먹지 말아야 한다.' 입니다. 이 중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걸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후회하지 말자'를 선택할 겁니다. 학창 시절 소심한 성격 탓에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몇 번이고 곱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해볼 걸….' 그렇게 되뇌고서도 같은 장면에선 또 실수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고, 이를 바깥으로 표현할 자신감도 없었으니 매번 속으로 삭혀 왔었습니다. 지금은 이전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일까요. 심적으로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서 갖게된, 자기 모습을 돌아볼 여유 말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못났던 시간을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게 되면서 어려운 문학작품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리는 거죠.
최근 트레바리라는 독서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참여한 적 있는 독서모임 플랫폼인데요. 첫 모임의 책은 밀란 쿤데라 작가의 '농담'이었습니다. 모임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책에 대한 후기를 나누는 시간 중 인상 깊었던 말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역할에 따라 사건을 다르게 판단한다.'
언젠가 크게 공감했던 적이 있는 문구였는데, 이상하게 이 문장을 듣는 중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책에서 느꼈던 묘한 감정을 정리해 주는 표현이라 그랬던 것 같긴 합니다. 한편으로는 작게는 마음가짐, 주변 환경, 더 나아가 역할에 맞게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짝수년 차에 퇴사가 당기는 시점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홀수년도 라는 말도 있고 짝수 연도라는 말도 있지만, 여하튼 일에 권태기가 오는 시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 상황을 보면 그런 시점을 지나고 있나 봅니다. 정확히는 업무나 퇴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일까요? 막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편함입니다. '막내'라는 역할의 베테랑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요? 회사의 업무가 아닌, 막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법에 대해 조금 더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이쯤에 의문이 듭니다.
'난 막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게 맞을까? 분명 이끌어가는 능력도 있을 텐데, 확인해 볼 기회를 맞이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닐까? 더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있지 않을까?'
업무의 특성상 부서장들과 대면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서원의 입장이 아닌 부서장의 입장으로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막내가 편합니다. 책임은 당연하거니와 인적 관리까지 추가로 해야 합니다. 부서원이 잘하는 부분을 북돋아 주며,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니까요. 차라리 이는 쉬운 편입니다. 인적 관리의 대상이 마음과 같게 움직여지지 않을 때도 많으니까요. 조직의 분위기와 성향이 다른 부서원이 있다면 업무보다 관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도 생깁니다.
매사 간접적인 경험으로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시겠지만, 경험이라는 단어는 대체 불가의 범주지 않습니까. 아무리 심적으로 공감을 한다고 해도 인생은 실전이니까요.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를 '역할'인 거죠. 그렇다고 단기간 내 리더의 역할을 맡고 싶진 않습니다. 허리라인으로써 팀을 지탱하면서 업무를 진두지휘하는 장군의 역할도 해보고 싶습니다. 작은 조직의 대장으로서 무게감을 느껴볼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전투성이인 인생에서 아주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소리란 걸 알지만, 닥치지 않은 상황을 바랄 수는 있는 거니까요. 사람이 점점 귀해지는 시대에서는 다양한 관점과 역할에서의 경험이 더더욱 중요해질 거란 생각도 있으니까요. 주니님은 어떤 역할에 대한 바람이 있으신가요?
시선을 조금 돌려보면 우리 자이언츠에도 다양한 역할의 선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주장이겠죠. 올해의 주장은 전준우 선수입니다. 첫 유니폼의 등번호 주인공입니다. 처음 야구를 보러 가는 친구들도 한눈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우리 팀의 주장. 직관을 가면 경기에서 활약했던 선수나 젊고 멋진 유망주에 넋을 뺏기지만, 집에 돌아서 머릿속을 맴도는 응원가는 결국 전준우라고 할 만큼 여러모로 마성의 캡틴입니다.
최강야구를 보며 감사한 점은 야구단 구성원 개개인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감독은 단순히 지시만 하는 역할이 아니고, 주장은 그저 무게를 잡는 역할이 아니며, 벤치에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등 말입니다. 프로에서 뛰던 선수들이었으니 현장감이 더욱 살아나는 거겠죠. 아마 자이언츠의 전준우 선수도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남다를 거로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니 더욱 그러지 않을까요. 막연하게 운동선수의 책임감이 아닌, 회사에서 우수한 리더가 짊어지는 책임감과 빗대다 보니 무게감이 또 다르게 느껴지는 거죠.
다른 역할을 하나 더 꼽자면, 자이언츠의 테이블세터이자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는 황성빈 선수입니다. 주니님이 꼽은, 트레이드가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인 마황(마성의 황성빈) 말입니다. 40개의 도루를 넘길 만큼 그라운드에서의 활기찬 모습은 팬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직관에서 보셨듯 가끔은 홈런을 칠 수도 있지만, 상대 팀 투수의 멘탈을 흔들고 팀의 사기를 충천해 주는 모습이 모두가 원하는 모습일 겁니다.
이외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는 손호영 선수, 이미 훌륭하지만, 이보다 더 성장하면 어디까지 더 멋져질까 싶은 윤동희 선수를 포함한 다른 모든 선수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입니다. 올해와 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알차게 해내고 매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직관에서 패배하더라도 팬들이 찾아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될 테니까요.
우리의 캡틴 전준우 선수도 분명 신인 시절을 겪으면서 성장을 했고, 자신의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매년 변해가는 팀의 상황 속에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줬었습니다. KBO에서 최정상은 아니더라도 뿌리 깊은 고목처럼 자이언츠의 주장이자, KBO 팬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정상급 선수가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사말로 돌아본 저를 통해 역할에 대한 고민과 바람을 털어놓는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가 동일 직종이거나, 심지어 같은 회사라고 했어도 처한 상황이나 역할은 달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득 상상해봤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업무를 했다면 어떨까요? 음, 다시 깊게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은 없는 게 좋겠습니다.
막내 역할에 찌들면서 다소 능동적이지 못한 모습도 있는 제 모습을 그려보며 잠시나마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고자 한 기한을 넘겨버리며 지각하는 모습을 보니 말이에요. 다소 진지했지만, 가볍게 주고 받기 시작했던 편지임에도 현재를 저를 돌아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단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기한을 더 잘 맞춰보겠습니다.
주니님은 우리가 지금껏 나누었던 취미나 해보고 싶은 일 외에, 역할 적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요? 직업, 직급이 아닌 직책 관점으로 본다면. 예를 들면 예전에 말씀하셨던 야구선수를 관리해 주는 의료인 중에서도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 말이에요.
편지를 쓸 때마다 생각 정리를 하면서도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보는 건 매번 흥미롭게 재미난 일이네요. 그럼, 답장을 기다리며 오늘의 편지를 마쳐봅니다.
- 야구가 소재이지만, 새우버거 먹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한 번 더 상기시키고 싶은 라이트한팬 드리킴 드림 -
P.S. 지난 편지에 새우버거를 함께 먹어주신다 하시니, 가장 맛있는 새우버거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습니다. 다른 프랜차이즈를 다 돌아봤지만, 롯데리아가 최고더군요.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