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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01. 2020

영화보다 극장을 좋아했다

일상 에세이

극장에 우리만 있을 때



영화를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할 테지만 엄밀히 말하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극장을 좋아한다. 상영관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극장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다. 그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문일 텐데 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과는 단절된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곳으로 한 발 내딛는 기분, 마치 헐리우드의 키드의 생애의 병석과 명길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극장의 밖에는 매표구가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구멍으로 티켓 매수와 연령제한이 있다면 나이를 말해서 티켓팅을 했다. 어릴 때에는 제1 관문인 매표소를 통과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데 그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안 된다고 하면 극장에는 못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제1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구입한 티켓을 반납하는, 극장의 대문 격인 그 문 앞에 있는 알프레도 아저씨 같은 문지기에게 걸리고 만다. 여지없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좀 더 자유롭게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로 성룡과 장국영, 유덕화, 주윤발의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극장에 들어가서 어두운 곳에 앉아서 밝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건 원초적인 본능인 관음을 일깨우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홈씨어터가 발전을 하고 넷플릭스나 OTT 같은 서비스가 나날이 솟아올라도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도 관음의 본능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는 순간 앞뒤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고 극장에 기어 들어온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며 밝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어 간다.

극장은 재미있는 요소가 가득한 공간이다. 메인은 상영관에 앉아서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지만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음료나 오징어를 씹으며 기대를 한 껏 끌어올리는 재미가 있다. 근래에는 멀티플렉스로 대부분의 상영관 형태가 다 엇비슷하지만 예전의 극장은 로컬 카페처럼 개성이 철철 흘러넘쳤다. 어떤 극장의 로비에는 거대한 수족관이 있어서 상영 직전까지 꼬깔콘을 먹으며 붕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고 어떤 극장의 로비에는 거대한 벽걸이 티브이가 정면에서 철 지난 영화를 계속 상영하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있었다. 또 어떤 극장의 로비는 벤치가 3층 창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창문을 통해 밖의 사람들이 피규어처럼 지나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의외로 재미있다. 무슨 옷을 입고 지나가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손에는 뭘 들고 가는지, 혼자서 다니는지, 같은 것들을 일행과 이야기를 하며 보는 것이 꽤 재미있다.

타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극장에 가는 것 또한 묘미다. 영화를 볼 땐 모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그래 맞아, 지금 여행 중이었지, 하며 여행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여행 중 여행이라는 걸 잊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춘천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아마도 그때 일행과 함께 춘천의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봤는데 그 날이 개관 첫날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거의 처음으로 티켓팅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반 상영관의 좌석을 예매했는데 로얄석이 있는 귀빈 상영관에서 관람을 하게 해 주었다. 첫 개관 기념이라고 극장 측에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거의 누워서 볼 정도로 편안하고 큰 좌석에서 봤다. 음료와 부식거리도 제공이 되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일행과 시시덕거리며 봐서 그런지 정작 무슨 영화를 봤지? 하게 되는데 아마도 핸콕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여름휴가 중 하루를 온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연달아 본 적도 있다. 일행과 함께 아침 일찍 극장에 들어가 늦은 밤이 되어서 나온 적도 있었다. 꽤 많이 볼 것 같지만 3편이나 4편 정도밖에 보지 못한다. 그 중간에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극장의 또 다른 재미는 영화가 끝나고 우르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극장을 빠져나올 때 방금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블랙스완을 보고 나올 때 어떤 커플이, 여자가 남자에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라고 하니 남자가 “가가 가한테 너무 가를 기댄기라”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했다.

요즘은 상영관에 먹을 것을 들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콜라를 담는 큰 컵에 맥주를, 팝콘 통에 생라면을 부셔서 넣어서 들고 가서 먹는 재미가 있다. 맥주가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소주를 좀 같이 넣어서 홀짝이며 생라면을 안주삼아 영화를 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생라면은 씹어 먹으면 소리가 크기 때문에 입 안에서 살살 돌려가며 녹여 먹는 맛이 있다. 별미는 짜파게티다. 그냥 생라면에 스프를 뿌려 먹는 것도 맛있지만 짜파게티의 스프를 뿌려서 생라면으로 살살 녹여 먹는 맛은 아주 별미다.

그렇게 좋아하는 상영관을 요즘은 거의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대비를 하고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어쩐지 기운이 많이 빠져 버렸다. 내가 있는 도시의 한 멀티플렉스의 로비에는 피규어 판매점이 있어서 상영관의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기 전에 피규어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 참 아쉽다. 극장도 얼른 기운을 받아 벌떡 일어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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