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Oct 20.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49

9장 3일째 저녁

249.

 사람들은 죽음 속에 자신은 집어넣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기 싫을 뿐이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동은 포함시켰다. 매일 포함시켰다.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죽음의 영역에 꽤 다가갔다고 생각했다. 마동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실제로 보았다. 그 모습은 계속 마동을 따라다녔다. 트라우마라고 정신분석학자들이 부르게 좋게 만들어 놓은 단어에 의해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어젯밤 뉴스에서는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나온 시체를 보고 지나가던 임산부가 아이를 유산한 소식이 전해졌다. 임산부는 각인되어 버린 그 모습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앞으로의 확신도 없었다. 직접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죽음의 순간을 직각적인 자각 작용으로 깨닫게 되면 그것은 가혹한 경험이 되어 버린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게 된다. 설령 그 임산부가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신에게서 벗어난 죽음의 경험이기 때문에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 바다에 가라앉은 배에서 건져내지 못한 시신들을 100일이 지난 다음 잠수부에 의해서 바다 위로 올라오지만 그 잠수부에게는 인간의 모습에서 완전하게 탈피한 시체의 모습이 눈을 감으나 뜨나 계속 나타난다. 그들은 매일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막으로 들어와 버린 시체들의 비참한 모습이 평범한 삶에 매복하고 있다가 눈치챌 수 없게 불쑥불쑥 나타나서 왜 깨우지 않았냐고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마동 역시 밤마다 악몽을 꿨다. 친구의 얼굴에 이 친구의 몸이 붙어있고 저 친구의 팔다리를 한 채 아이들은 마동의 주위를 돌며 기차가 지나가고 난 뒤에 납작하게 되어버린 대못을 들고 있었다. 친구들의 몸이 분쇄가 되었다는 공포와 기차에 대한 분노, 파업 소식을 잘못 전해 들은 것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모른 채 마동의 뇌 속 여러 구간에서 굶주린 절지류처럼 지속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비참하게’라는 이명이 매일 들려왔다. 적막한 어둠에서 무서운 자줏빛이 어떤 날은 콜롬비아어로 들렸고 어떤 날은 루마니아어로, 어떤 날은 크라켄이 되어 나타나서 말해 주었다.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한 후 마동은 정신과 상담을 받지 못했다. 시골에서 정신과 치료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전우를 잃었다. 조깅을 하다 지나치며 알게 된 노인도 이제 곧 아파트와 함께 생명은 끝날 것이라 했다. 서쪽 숲을 찾아 평생 헤매던 완구점 주인도 그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죽음에 대해서 훈련하는 것은 깊은 밤하늘의 달과 가까워지는 것이라 여겼다. 군대에서 마동은 침묵하는 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마동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미친놈이라 욕을 하겠지만 마동은 달의 언어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침묵 속의 언어는 마동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야.     


 그렇다고 해도 신체 변이에 대한 반응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마동은 받아들이는 수순을 비교적 잘 밟고 있었다. 그동안 죽음에 대해서 훈련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마동은 늘 잠도 부족했다. 매일 조깅을 하면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마동에게는 소용없는 논조였다. 잠을 일정기간 렘수면 상태를 벗어나서 잠들어야만 몸은 탈이 나지 않는다고 의학 관련 프로그램에서 의사들이 나와서 말했다. 마동은 육체를 구석까지 몰고 간 것인지도 모른다. 마동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점진적으로 잠자코 받아들이는 것이 훈련의 결과라 여겼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4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