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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08. 2020

하루키 신작 단편 '크림' 3

하루키 소설


3.

 내가 착각했나? 재킷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다시 한번 정보를 확인했다.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초대장의 지도를 자세히 봤다. 그러나 내가 잘못 본 것은 없었다. 지도에 있는 그대로 나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도로도 맞고, 버스정류장도 맞고 시간과 장소 역시 맞았다. 나는 침착하려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걸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단 연주회장으로 가서 피아노 연주를 보는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해 가면서 산 정상으로 올라서 드디어 건물에 도착했다. 제대로 도착은 했지만 연주회장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강철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두꺼운 체인으로 문이 둘러져 있었고 무거운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 난 작은 틈으로 꽤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자동차는 한 대도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보도블록 사이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주차장은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입구에 있는 큰 명패가 말해주었다. 이 장소가 내가 찾고 있는 연주회장이라는 것을.


 나는 입구 옆에 있는 인터콤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힘 있게 버튼을 다시 눌렀다. 인터콤은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음성이 나와야 할 곳에서 정적만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연주회는 15분 후에 시작이었다. 꽉 다문 커다란 문은 전혀 열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문에는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졌고 녹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왔다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묘한 곳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라는 것에 도달하면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한 번 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인터콤 버튼을 조금 길게 눌렀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침묵은 드러내 놓고 계속 이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11월의 차가운 문에 기대어 십분 정도 서 있었다. 곧 누가 나타날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졌지만 역시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의 안쪽이든 밖이든 도대체가 미미한 움직임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조금 전의 적막처럼 지저귀는 새도 없었고 짓는 개도 없었다.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회색 구름이 담요처럼 적막을 덮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포기해버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도 할 수 없았다. 이런 불운하고 기분 나쁜 깜깜함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거리의 뒤쪽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피아노 연주 같은 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어나서 꽃다발을 들고 그대로 집으로 가는 것뿐이다. 집에 가면 엄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 꽃다발은 뭐야?"라고 묻겠지. 그러면 나는 또 변명 같은 말을 하게 되겠지.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일 발자크를 읽을 때처럼.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봤다. 생기를 다 빼앗겨버린 조화 같았다. 이 꽃다발을 역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꽃다발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비싼 꽃다발이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아늑하고 작은 공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 한 채가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공간의 공원이었다. 공원은 질 좋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곳을 공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들었다. 흔한 분수대도 없었고 놀이기구도 하나 없었다. 있는 거라곤 중간에 툭 튀어나온 듯한 작은 정자가 있을 뿐이었다. 정자 벽면은 기울어진 격자모양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이 돌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수풀도 보였다. 바닥에는 납작한 정사각형 디딤돌도 있었다. 이 작은 공원은 적어도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공원에서 벗어난 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공원은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나무와 풀들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주변에 잡초나 쓰레기도 없었다. 언덕 위로 올라갈 때는 공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올라왔는데 내려오는 길에 비로소 눈이 들어왔다.


 나는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서 정자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여기에 앉아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저기 위의 연주회장은 도대체 언제 연주가 열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이 물고 서로 연결된 하나의 꽈리처럼 엉켜 있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집중을 하면서 생각에 빠져 연주회장까지 걷느라 나는 몹시 지쳤고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실은 좀 기묘한 힘듦이었다.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특이한 종류의 고단 함이었다. 분명 나는 지쳐버린지가 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 시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기분은 앞으로 살면서 또 여러 번 겪을 것이라는 사실과 이런 종류의 힘듦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계속]


직역: 김가은

인스타그램  @kankim.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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