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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31. 2020

눈 때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갇힌 날

일상 에세이

칸딘스키의 오마주/마우스 그림


몇 해 전 겨울에 일어난 일이다.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운전을 해서 갔다면 버스를 탈 때만큼 멍하게 있을 수 없기에 가끔 고속버스를 탄다. 고속버스에서 멍하게 아무런 생각 없이 밖을 보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도 좋다. 먼 거리를 갈 때 고속버스에서 잠이 드는 것이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것보다 훨씬 개운하다.


그때가 2월 중순이었는데 그 전날 엄청난 눈이 전국에 내렸다. 한반도가 마치 새하얀 무스케이크 같은 모습이었다. 눈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릴 기세였다. 하늘에서 좀 못된 마음을 먹고 내려서인지 굉장했다. 만약 원더우먼이 봤다면 또 한 번의 매직이군요,라고 했을 것이다. 갤 가돗이 원더우먼 1편에서 처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크리스 파인의 품에서 그런 대사를 했다.  


눈은 모든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눈은 흡사 죽음과 같다. 눈이 내리면 공평하게 모든 곳에 똑같이 눈이 내린다. 교회에도, 절에도, 아파트에도 도로에도 가로등도 다 눈을 맞는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아주머니도 눈을 맞는다. 공평하다. 인간의 죽음도 공평하다.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세상을 새하얗게 덮으면 예전에는 안 하던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곳은 바닷가라서 그런지 그렇게 뉴스에서 처럼 떠들썩한 것과는 다르게 눈이 내리자마자 사라졌다. 쌓여서 새하얗게 보이는 매직이라 할 만한 눈은 잘 볼 수 없었다.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보는 풍경은 군데군데 모아놓은 천덕꾸러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땅바닥은 젖어 있을 뿐이었다. 제주도보다 눈이 덜 내리는 곳이다.


고속버스를 탈 기회가 그렇게 많이 없기 때문에 고속버스를 탄다는 건 내가 늘 다니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탈과도 같은 것이다. 꼬마였을 때는 멀미 때문에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는 설렘보다 고속버스가 그저 거대한 바퀴 달린 네모난 악어처럼 보였다. 그렇게 심하던 멀미도 어느 기점으로부터 산타할아버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속버스의 의자는 마치 '당신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어요'라며 다소곳하게 보였다. 우등고속이라 홀로 좌석에 건방진 자세로 퍼져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으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가면 된다. 책을 펼치고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읽으며 나는 스티븐 킹의 소설 속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했다.


이윽고 버스는 서서히 움직였다. 거대한 벌레 같은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두근거린다. 책을 펼친 채 잠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둔다. 군데군데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눈 뭉치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추운지 등을 구부리고 지나치는 모습도 보였다.


겨울의 차가운 대기는 아름다운 태양빛을 눈부시게 산란시켰다. 사람들은 여름처럼 눈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히고 길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런 모습을 보면 모두 비슷한 움직임이지만 다른 철학이 개개인에게 있는 것 같아 신기하다. 길고 긴 우등고속버스가 좁은 도로를 구불구불하게 빠져나갈 때는 마치 어린 시절 극장에서 화면으로 본 로봇의 운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택시의 뚜껑이 보이고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 윗부분도 보인다. 인도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정수리도 가끔 보이고 혀를 내밀고 걸어가는 강아지의 등도 보인다. 버스에 건방진 자세로 앉아 창밖으로 보는 세상은 전부 눈 밑에 있었다. 오랜만에 장거리 버스를 탄다는 건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게 만든다. 멍해져도 좋을 시간, 좋을 장소다.


버스는 롯데 백화점을 경유해서 현대호텔을 지나 제니스 성형외과를 지나쳐 메인 도로로 빠져나온다. 도로 위로 올라온 대형버스는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갑고 경쾌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거대한 버스는 서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학이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를 지나 톨게이트를 향해 버스는 빠르게 돌진했다.


가까운 창밖의 풍경이 시놉시스처럼 빠르게 흘렀다. 경주를 지났다. 경주를 지나니 날이 스산하고 흐렸다. 하늘은 잿빛을 잔뜩 짊어지고 우울한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보였다. 창 하나로 가로막혀 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무척이나 차가워서 십 분만 서 있으면 다리가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버스 안은 따뜻했고 의자는 편안했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까지 3시간은 넘어가야 했다. 실컷 자고 일어나도 2시간이 남을 것이다. 버스는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버스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올라탄 고속버스는 대구를 지나칠 무렵에 더 이상 도로 위를 달릴 수 없다며 가장 가까운 휴게소에 거북이 운행으로 들어갔다.

눈 때문이었다.


경주를 기점으로 해서 위 지방으로 갈수록 며칠 동안 내린 눈 때문에 도로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구에서부터 잿빛 하늘은 눈을 계속 뿜어대고 있었다. '마이 페이보릿 띵'이 어울릴법한 광경이 창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은 전부 눈으로 덮여있었고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휴게소에 들어가기 전에 버스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만큼 천천히 움직였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예보가 없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날씨는 버스를 그만 휴게소에 묶어두게 만들었다. 얼마 동안 휴게소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몰랐다. 비처럼 쏟아지는 눈은 휴게소에 들어온 차들은 잠깐 사이에 전부 하얀색으로 만들었다.


눈의 세계라는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웅성거리며 계획에 차질이 있는 것처럼 불안해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휴게소에 들어간 버스 때문에 잠을 자던 사람들이 일어났고 옆 좌석에 앉은 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사람들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처지를 걱정했다.


평일이라 사람들은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큰일인 것이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통해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나를 제외한 버스 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려서 안절부절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4일 동안 아무런 할 일도, 바쁜 일도 없었다. 멈춰버린 이 시간을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될 대로 돼라, 식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도 좋을 법한 어두침침한 날 가운데의 폭설이었다. 눈이 더 펑펑 쏟아져 집채 더미처럼 쌓이든, 그 쌓인 눈이 얼음으로 변해서 그곳에서 펑, 하며 미스터 프리즈가 나타나서 다이아몬드로 저온상태를 유지하며 극 냉동복을 입고 극저온 블래스트를 웃으며 사람들에게 마구 쏘아댄다고 해도 어쨌든 3일이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시계가 아무리 일그러질 정도로 삐뚤어져 가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영차 영차 하면 대체로 3일이면 일상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고 있으니 눈이 앞을 내다보지도 못할 만큼 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만난 엄청난 양의 눈을 반기는 사람들은 아이들뿐이었다.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니 방뇨의 기운이 올라와 화장실로 향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의자 위에 올려놓았고 카메라를 꺼낸 가방 속에는 누군가 가져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책 위에 같이 올려놓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 카메라는 30년이 넘은 올림푸스 팬 시리즈 중에 하나다. 지금은 단종이 되어서 더 이상 새로운 팬 시리즈를 구입할 수 없는 카메라로 필름을 밀어 넣으면 하프 타입인 카메라다. 필름의 고유한 색감을 잘 표현해 주었으며 비교적 작동 방법이 간단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겨울의 냉기가 얼굴을 훑었다. 펑펑 내리는 눈 때문에 마치 삼포 가는 길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아주 차가운 기운이 얼굴에 와 닿았고 발밑으로 눈이 밟혔다. 버스에서 내려서 보는 세상도 온통 새하얀 눈밭으로 덮인 휴게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가서 내가 낸 발자국을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찰칵.


휴게소에는 차들이 밀려 들어와서 그런지 평일 치고 사람들이 많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일에도 끊임없이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여행을 가고 밑 지방에서 윗 지방으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었다. 평일에는 대부분 일을 해야, 까지 생각하다가 더 이상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휴게소에도 일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휴게소는 일터이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일탈 같은 곳이다.


국도에 있는 작은 휴게소의 화장실과는 달랐다. 깔끔하고 깨끗한 음악도 솔솔 흘러나왔다. 오줌을 시원하게 봤다. 소변이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체온이 조금 빠져나갔다. 순간 몸이 떨렸다. 손을 씻고 말린 다음에 화장실 입구에 서서 팬으로 또 몇 컷의 사진을 담았다. 그러는 동안 추위가 몰려와서 휴게소 안으로 들어왔다.


휴게소 안에 풍기는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어딘지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그건 대부분이 급격하게 내리는 폭설 때문에 억지로 휴게소에 들어온 기운이 강해서 일지도 몰랐다. 일단 휴게소 안으로 들어왔으니 사람들은 돈가스를 먹고, 핫도그를 먹고, 감자를 먹고, 김밥과 어묵과 콜라를 먹었다. 어쩐지 다른 날 보다 더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실내에 가득했다.


커피부스로 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종이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는 뱀파이어의 팔에서 짜낸 피처럼 보였다. 이만큼 큰 종이컵에 요만큼 되는 에스프레소를 담아서 창밖이 보이는 긴 바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에스프레소는 쓰다. 쓴 맛으로 먹는 것이 에스프레소다. 고개를 숙여서 카메라의 거리 측정하는 주둥이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때 옆으로 누군가 앉았다. 여자였다. 그 여자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로 오래전 모델인 니콘 D70이었다. 카메라를 만지고 있으니 혹시 아냐며 D70의 브라케팅에 대해서 물었다. 그래서 브라케팅으로 사진을 담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는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다. D70은 오래전 카메라지만 꽤 잘 나온다. 카메라는 새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찍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좋은 사진과는 무관하다. 오래된 카메라일수록 어쩌면 더 드라마틱하게 담을 수 있다. 어지간한 건 다 담아낼 수 있다. 무슨 렌즈가 좋냐고 물어보기에 탐론의 90미리 마이크로 렌즈를 추천했다.


여자는 사진동호회 소속으로 모두가 신입들로 이루어진 모임인데 먼 곳으로 출사를 가는 도중에 이렇게 휴게소에 고립되었다고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테이블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중급 이상 모이는 곳에서 합류하는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 고립되는 바람에 잘 모르는 카메라로 눈 오는 풍경을 담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D70으로 몇 년 동안 사진을 담은 적이 있어서 그 카메라에 대해서는 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할 땐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옷차림인데 여자만 정장 차림이었다. 일행들은 대체로 등산복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여자만 검은색 정장 차림에 색조화장과 눈 화장에 머리도 방금 숍에서 하고 온 것처럼 웨이브가 파도처럼 아름다웠다. 얼굴을 보니 30대 초반? 중반? 쯤 되어 보였다. 일행은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로 대체로 4, 50대로 보였다. 다른 여자 일행도 있었는데 나이가 꽤 많은 여성들이었다. 모두가 손에 대포 같은 카메라를 한 대씩 들고 있었다.


이후로 카메라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그곳의 휴게소는 2층으로 나뉘었는데 거기에 올라가서 망원렌즈로 사진을 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카메라를 들고 뷰에 눈을 대고 자세를 잡으니 영락없는 스나이퍼처럼 보였다. 검은 매니큐어가 반짝이는 손톱과 길쭉한 손가락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받치고 카메라 바디를 잡고 셔터를 누르면서 연신 이렇게요? 이렇게요? 물었다. 목소리가 농밀했다. 마치 캐러멜을 불판에 녹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필름 카메라에 대해서도 흥미를 보였다. 디지털카메라처럼 찍고 바로 볼 수 없으니 빠른 디지털에 비해 시간이 느린 게 필름 카메라다. 올림푸스 펜은 앞으로 툭 튀어나온 구경으로 거리 조절이나 밝기를 조절하는 정도다. 필름을 다 사용하고 나면 수동으로 열심히 앞으로 감아야 한다. 다 돌아가면 끄그그극 하는 소리가 난다. 그러면 필름을 분리하고 현상을 한 다음 인화를 해서 사진을 손으로 들어야 비로소 사진의 완성이 된다.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자신도 필름으로 한 번 사진을 담아보고 싶다며 내 손을 어쩌다가 잡았는데 나의 손이 너무 차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나의 손을 그녀는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화장실로, 까지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때 눈이 많이 내려 휴게소에 들어간 것 까지는 맞지만.


오늘은 참 춥네요. 올 한 해도 잘 버텼습니다. 내년에도 어떻게든 견뎌봅시다. 복 많이 받으세요.

https://youtu.be/6b8fCx6It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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