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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25. 2020

어항 속 세계에도 각각의 사정이 있다

일상 에세이

카페의 어항 속의 니모들과 산호와 말미잘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몇 년 동안 지치지 않고 창가의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아마 카페의 주인도 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페는 작은 공간인데 풍성했다. 그 카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피가 제일 맛있어!라고 커피 향이 말해주었고 유행을 타지 않는 음악이 늘 흘렀다. 잔뜩 쌓여있는 시디가 주인의 취향을 짐작케 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풍성함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한 건 열대어가 있는 어항이었다.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시작은 길이가 60센티미터에 높이는 25센티미터 정도 되는, 물고기는 니모 두 마리에 말미잘 한 마리뿐인 작은 어항이었다. 산호나 다른 물고기는 없었다. 그런데 이동도 없는 말미잘과 두 마리뿐인 니모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원래 연못이나 저수지의 잉어의 움직임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인지 어항 속의 니모의 유영을 보고 있는 것은 의식이 Zilch상태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저 ‘무’의 상태로 가만히 어항 속을 삼십 분, 사십 분씩 바라보게 된다.


매일 꾸준하게 보다 보면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 각각의 사정에 맞게 작은 어항 속이 자신들의 집이라 여기며 생활했다. 물고기 따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에게는 그만한 이유 역시 분명하게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를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소용없어진다. 어항 속의 풍경에 한없이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카페의 주인은 어항 속의 물고기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여 년 동안 어항의 크기도 커졌고 어항 속의 세계도 풍성해지고 물고기 역시 늘어났다. 규모가 입을 벌릴 정도로 상당해졌다. 어항의 길이가 옆으로 1미터가 되었고 높이는 50센티미터의 크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산호초 종류만 스무 여종이나 되었다. 열대어와 산호초를 꾸준하게 관리하는 일은 참 대단한 일이다. 그건 그 세계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괴생명체처럼 보이는 말미잘도 있고 사람의 뇌처럼 보이는 산호도 있고 들꽃처럼 보이는 산호도 있다. 하늘하늘 거리는 촉수가 비어져 나와 있는데 물고기들이 닿으면 괜찮은데 사람의 손이 달으면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물의 흐름이나 어항 속을 비추는 빛의 양에 따라 촉수가 나오거나 들어가기 때문에 빛의 양과 물의 흐름, 물의 세기를 매일매일 체크해서 관리를 해야 한다. 정말 박수를 치고 싶다.


그래야만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산호와 말미잘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니까 어항이 커졌다면 그 커진 만큼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 년 동안 죽어 없어진 산호와 물고기도 몇 마리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세계가 싫어서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거대한 어항을 가지고 산호와 물고기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항 속에는 죽어가는 산호가 있었다. 죽어가는 산호는 죽어가는 물고기와는 다르게 죽고 난 후 다른 산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든지 다른 산호의 서식지가 된다. 어항 속이지만 대단한 세계다.


어항 속에는 불가사리도 한 마리 있었다. 불가사리의 종류도 수만 가지에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불가사리는 어항 속에 깔린 모래나 돌에 붙어있는 균이나 녹조류 같은 것을 먹어치운다고 해서 입양을 했지만 어느 순간 불가사리가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니 불가사리 역시 이 세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부터 점점 흐물흐물하게 녹아 없어지더나 그 형체도 없이 물에 녹아버렸다는 것이다. 안타깝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어항 속에 있는 생명체들은 각각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맞게 어항의 주인들은 어항 속에 맞는 생명체들을 입양해 온다고 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니모들의 행동을 관찰하면 아주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커진 어항 속에는 세 마리의 니모가 있었다. 니모는 암수 구별이 없다가 후에 자신이 원하는 성별을 택하여 교배를 한다. 세 마리의 크기는 다 다르다. 가장 큰 놈, 중간 놈, 작은놈 이렇게 나뉘는데 이들의 놀이터는 그동안 어항 속에 넣어둔 작은 커피 잔이나 소품 속이었다. 그런데 산호가 들어오고 나서 어항 속 가장 큰 산호와 함께 놀기 시작했다.


산호에서 부드러운 촉수가 나오면 니모는 그 촉수에 몸을 비비며 아,, 나 너무 좋아, 하는 모습으로 산호 속에서 몸을 비볐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큰 니모가 산호에서 몸을 비빌 때는 두 마리의 니모는 절대 산호에 가지 않는다. 그러면 나머지 두 마리는 산호를 싫어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큰 니모가 산호에서 나오면 중간 니모가 산호에 들어가서 몸을 비볐다. 그들은 서열이 확실했다. 하지만 제일 작은 니모는 절대 산호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봤을 때 중간 크기의 니모의 몸에 검은 점들이 많이 생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데 서열이 강한 니모가 밥을 다 먹어버리고 서열이 낮은 니모는 먹이를 먹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먹이를 줄 때 가장 작은 니모를 위해 손을 집어넣어 다른 물고기가 가장 작은 니모의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면 중간 니모가 손을 공격한다. 이런 모습은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봐도 나온다. 첫 부분에 어린 니모가 잡혀있을 때 아빠 니모가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니모인가? 암튼 서열이 두 번째인 니모가 공격을 한다. 이런 니모의 습성을 관찰해서 애니메이션에 삽입했다. 중간 서열의 니모가 서열이 가장 높은 니모를 받들면서 서열이 가장 낮은 니모를 보호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러니 중간 니모가 스트레스가 심해서 몸에 검은 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항 속에는 두 마리의 새우도 산다. 두 마리의 새우도 ‘니모를 찾아서’에 나오는 새우와 같다. 새우의 역할은 물고기에 붙어있는 세균들을 먹어치운다. 새우는 가만히 있는 물고기에게 다가가서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터에 앉아서 흙을 파먹듯 가늘고 긴 다리로 정교하게 물고기의 몸에 붙어있는 세균을 떼서 오물오물거리며 먹는다. 어항 속에는 락 블레니라는 아주 못생긴 물고기도 한 마리 있다. 락은 다른 물고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헤엄을 친다. 생긴 것도 망둥어처럼 생겼다. 다른 물고기처럼 시종일관 떠다니지 않고 산호에 붙어있든가 바위에 늘 안착해있는 경우가 많다. 락은 발처럼 생긴 지느러미로 산호를 꽉 움켜쥐는 모습으로 붙어있다. 얼굴은 전혀 표정이 없고 육상동물처럼 눈코 입이 앞면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락은 어딘가에 늘 찰싹 붙어있다. 그러면 새우가 다가간다. 새우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아아 귀찮아! 오늘은 긁어낼 세균이 없는데? 하는 표정을 짓고는 새우를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면 새우는 당황하며 락이 떠난 바위를 긁는다. 그렇지만 락은 평소에 새우가 자신의 몸을 청소해주는 걸 좋아한다. 새우에게 몸을 맡긴 다음 아 정말 시원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걸 보면 참 재미있다.


그러던 중 새로운 가족이 한 마리 들어왔다. 복어 종류인데 다른 물고기들에 비해 움직임이 아주 느리고 지느러미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 마치 허공에 공중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복어 종류는 몸이 갑각류처럼 껍질로 덮여 있어서 몸을 유선형으로 휘어지는 헤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치 갈치가 세로로 헤엄을 치는 것처럼. 그 작은 복어의 유영은 시선을 몽땅 앗아간다.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하지만 다른 물고기가 조금씩 자라는 것에 비해 작은 복어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자라지 않는 것이다. 몸 색채가 노란색과 갈색의 중간색을 띄었는데 그 색이 나날이 옅어져 갔다. 몸 안의 내장기관이 다 보일 정도로. 약을 써보고 다른 곳에 옮겨 물을 더 깨끗하게 해 주었지만 얼마 뒤 죽고 말았다. 그렇게 그곳의 세계는 변하고 변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물고기는 사라져 갔다. 그것은 내가 있는 인간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바꿔 말하면 인간도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보면 사라지고 만다. 영화 기생충의 기택처럼. 


그들은, 물고기들은 정직하며 솔직하다. 인간들처럼 자신의 기준에 타인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고픈 주인의 노력과 어항 속 세계에서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누구에게나 각각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페 주인장의 시디


늘 앉던 자리에서 보는 바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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