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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0. 2020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

그림 에세이

나처럼 아마추어의 글이 아닌, 제대로 된 프로의 글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한때, 한동안 내가 손을 뻗으면 바로 손에 쥘 수 있는 책들 중에는 꼭 들어있어야 하는 작가들의 책이 있었다. 잡지 지큐의 이충걸 편집장, 월간 페이퍼의 황경신, 그리고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의 책은 반드시 내가 손을 뻗는 곳에 꼭 있었다. 아니 꼭 있어야 했다. 그들의 글을 읽는다는 건 그들의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게 보일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이는 글이었다. 그들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감각이 전부 하나하나 살아서 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큐는 다 보지도 않으면서 이충걸 편집장의 시작하는 글을 읽기 위해서 아이패드로 매달 받아보기도 했다. 이충걸의 소설 '완전히 불완전한'은 딱딱한 시멘트 땅에 삽질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고(훌륭하다는 말이다), 황경신은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을 인스타그램에 균처럼 퍼지게 만들었다. 나오는 책마다 사람들이 주문을 하여 읽어댔다. 정말 대단했다.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면 난처하지만 황경신의 책을 추천하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았다. 


오늘은 김혜리 기자의 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김혜리 기자의 영화에 관한 책은 사실 나에게는 어렵다. 영화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그림, 음악, 의상, 건축, 사진 등)이 영화보다 선배이기에 선배 예술에게 신세를 지는 예술로 잘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역사가 있고, 당연하지만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림이나 소설은 한 작가가 만들어내지만 영화는 감독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렇다고 연기자만 있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서적은 좀 어렵게 쓰여도 괜찮다고 본다. 쉽고 밝고 복잡하지 않게 설명하거나 리뷰하는 건 이제 유튜버들의 영역이 되어 있으니 영화서적은 적극적으로 전문성을 띠어서 좀 어렵다고 해도,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혜리의 글은 짧던 길던 허투루 넘길 수만은 없는 것 같은 글로 가득하다. 7년 전인가 한창 트위터를 할 때 새벽 3시에 김혜리 기자가 트위터 라인에 있기에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답이 왔다. 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인해달라고 했나?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김혜리의 영화가 아닌 이야기의 책 '그림과 그림자'에 소개된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라는 제목의 그림을 리뷰하는 글을 올려본다. 밑의 그림은 그 그림을 내가 따라 그려본 것이다. 아마 책 속에서 실제의 그림을 보면 주인공의 얼굴이 내가 그런 것보다 훨씬 예쁘다. 미완성의 그림 하나를 보고 저 글을 쓴 것도 놀랍고, 저 짧은 글을 읽고 있으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테이크가 되어 촤르르 흘러간다.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 미완성, 캔버스에 유채 - 


소녀는 예뻤다. 마을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속삭였고 거울도 확인시켜주었다. 자신이 철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만 수줍음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행 열차 삼등칸에 오르던 날, 봄바람이 약속했다. 오늘이 너의 남은 생을 통틀어 가장 초라하고 추운 하루일 거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열정을 알아봐 줄 틈을 좀처럼 내지 못했다. 극작가가 점심을 먹는 두 시간 동안 찌는 듯한 오디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화장은 녹아내리고 마음은 무너졌다. 한때 스캔들을 염려하는 배우의 삶을 그렸으나, 이제 그녀는 가끔 윤기 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애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양과 희망의 결핍으로 갈라진 머릿결과 말라붙은 표정을 쇼윈도에 비추어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난 무인도에 가더라도 시선을 끌지 못할 거야.”


최악의 고역은, 마음의 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도 한 줌의 자긍심을 그러모을 수 없는 순간조차 도도한 표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순간 자기 안의 마지막 광채가 스러진다는 걸 알기에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며칠 전부터 여자는 크리스마스를 잊으려고 애썼다. 알록달록한 장식에 눈감고 캐럴송에 귀를 막았다. 마지막 순간 뜻하지 않은 친절이 끼어들었다. 계단이 삐걱 이길 기다렸다는 듯 문을 밀고 나온 주인집 여자가 크리스마스 푸딩을 건넸다. 전채도 메인도 없는 크리스마스 만찬의 후식. 여자는 지독하게 단 푸딩을 허겁지겁 한 조각 입에 넣었다가 멈칫했다. 아냐, 어차피 불을 붙일 브랜디도 없는 걸. 하지만 파란 불꽃이 일면, 골목을 배회하던 크리스마스 유령 하나쯤 식탁 건너편에 나타나 나의 눈동자에 건배해 주지 않을까. 1년 중 가장 긴 밤, 여자는 턱을 괴고 브랜디를 사러 갈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화가 중 동료들보다 흐릿한 이름을 남기고 마흔셋에 타계한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의 미완성작이다. 제목의 서러운 단어 ‘가난’은 ‘여배우’라는 예민한 이름과 만나 곱절로 처연해지고, 여기에 ‘크리스마스’까지 보태지면서 참을 수 없는 한기를 불러일으킨다. 비운에 신음하는 청순가련한 여인, 정념이 초래한 파국의 풍경, 간드러진 장식성과 센티멘털하고 강박적인 세부 묘사.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의 그림은 현대 TV 일일연속극의 시조처럼 보인다. 존 에버렛 밀레이, 포드 매덕스 브라운, 윌리엄 홀먼 헌트 등 라파엘 전파는 공히 빈곤이나 타락으로 사회적 곤경에 처한 여성을 자주 그렸다. 하지만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에 개탄의 시선은 없다. 마티노는 여배우의 파리한 얼굴과 푸딩을 장식한 호랑가시 나뭇가지를 공들여 묘사한 다음 어떤 이유에선지 붓을 놓아버렸다. 아마 주제와 스토리가 너무 빈약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방치된 캔버스의 창백한 공백은 도리어 생의 피로와 고립을 백골처럼 드러낸다.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성스러운 도안의 크리스마스 카드도 이 미완의 그림만큼 나를 경건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김혜리 - 그림과 그림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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