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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27.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317

11장 4일째 저녁

317.


 남자는 는개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따라 들어가면 이제 문을 닫지도 않고 는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만 남자는 는개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는개는 중학생이 되었다. 교복을 입은 는개의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훨씬 여자다웠다. 모든 아이들이 앞머리를 일자로 만들어 단발로 학교를 다녔던 것에 비하면 는개는 이마를 드러냈고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말수가 적었고 교내에서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파우스트 같은 책을 늘 읽었다. 아이들과 말을 섞지 않았고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물처럼 생활했다. 수업시간에는 졸지 않았으며 성적은 상위권을 달렸다. 생리가 불규칙적이었고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야 했다. 가끔 아버지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는 없다고 짧게 대답을 했다. 는개는 이슬비처럼 움직였다.


 어느 날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있는데 남자(새아빠)가 들어오지 않았다. 는개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남자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남자의 쓰다듬기가 중단되었다. 거짓말처럼 남자는 는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는개에게 변화가 오지는 않았다. 는개는 여전히 이슬비처럼 고요했고 조용히 움직였으며 채식 위주로 소식을 하며 지냈다. 수업시간에 늘 그렇지만 졸지 않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볕이 드는 곳에서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었다. 는개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엷게 만들었다. 너무 엷게 만들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한 밤중에 정전이 되어버린 집안에 혼자 있는 당찬 어린아이처럼 는개는 그렇게 지냈다. 여전히 세상은 흐르고 있었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밭은 숨을 내쉬었고 계절은 바스락 거리며 반복의 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날은 찬란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성큼 들어온 날이었다. 아침에는 이제 제법 쌀쌀해지는 날씨가 되었고 집 앞에는 가을 새들이 찾아와 울어댔다. 는개는 학교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으로 오고 있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걸으며 로테에게 마음과 혼을 다 빼앗겨버린 베르테르의 고독에 대해서 빠져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눈을 감고도 천천히 발을 옮기면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훤했다. 집 근처의 마을로 접어들었을 때 는개는 누군가에게 낚아 채였고 악 하는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몸이 무서운 완력이 의해 끌려갔다. 그 힘은 는개의 팔을 뽑아 버릴 것처럼 잡아당기고 있었고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이렇게 센 완력은 처음 느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몸이 재빠르게 적응을 하지 못했다. 몸은 이미 이곳으로 와 있었지만 신체에 반응하는 의식이 저곳에서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는개가 읽고 있던 책은 바닥에 떨어졌고 는개는 골목 어귀로 끌려갔다.


 는개를 끌고 간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고 그들이 끌고 간 곳은 집들이 촘촘히 붙어있는 80년대 주택개발에 의해 지어진 주택지의 골목이었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없었지만 오후의 황량함이 코 안을 버석거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지에서 다 큰 여중생이 납치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는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중에 한 사람이 는개의 얼굴에 서슬이 퍼런 칼날을 들이댔다. 눈동자 가까이 다가온 칼날의 뾰족한 끝을 보니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 그것이었다.


 그들은 3명이었고 금품을 갈취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은 칼을 는개의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고 한 사람은 는개의 한쪽 팔을 잡고 있었고 한 사람은 치마를 입고 있는 는개의 다리 사이에 다리를 집어놓은 상태였고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는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계속 가슴 한구석에서 견디지 못하고 심각한 펌프질을 했다.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몸 안에서 생명을 위해 활발히 작동하는 기관들이 엉망으로 불끈거리며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성인 남자 세 명에게 중학생인 여자아이가 동네에서 벌어진 겁탈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미미하기만 했다. 는개는 그저 힘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는 골목이 많았다. 골목은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골목에 주택의 대문이 오종종 붙어있었는데 폐쇄되어버린 공장에서 찍어 냈을 법한 녹슨 철문들은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부 일터로 나가거나 학교로 가버려서 어느 누구도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동네의 개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는개의 몸은 지구에서 달까지 달려가 버린 자동차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이 떨림은 언젠가 맛 본 불운한 떨림이었다. 치마사이로 사내의 무릎이 들어와서 는개의 다리는 더 벌어졌다. 눈동자 앞의 칼날 끝에서 방사능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선단 공포의 무서움을 알 것 같았다. 저것이 눈을 통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까마득한 두려움에 몸의 힘이 몽땅 빠져나가버렸다. 칼끝이 너무 무서워 는개는 시선을 맞은편 사내의 얼굴로 옮겼다. 사내의 눈동자는 사람의 눈빛에서 벗어나 있었다. 후피 동물의 단단한 피부도 물어뜯어 버리는 악어의 눈빛이었다. 시간이 그대로 묵은 상태로 변질되고 는개는 그만 오줌을 지렸다. 눈앞에서 누른 이를 드러내 놓고 웃고 있던 사내는 새아빠라고 불리는 남자와 말끔한 차림으로 집에서 가끔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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