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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28.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318

11장 4일째 저녁

318.


 는개는 남은 모스카토를 다 부어 한 번에 꿀꺽 마셨다. 마동은 의자에 기댄 채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맨하탄스의 샤이닝 스타가 흘러나와서 거실을 가득 매웠지만 마동의 귀에 그들의 노랫소리는 그저 조용한 잡음과 같았다. 그녀는 아픈 과거를 지니며 살아오고 있었다. 마음에 큰 아픔을 지닌 사람 대부분이 아픈 과거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는개는 그동안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왔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당신은 왜 안 마셔요?”


 “마시고 있어. 천천히 마시고 있다구.”


 는개는 싸구려 와인 한 병을 더 땄다. 병마개를 돌려서 따는 와인이었다. 따는 재미가 없는 마동 같은 와인이었다. 는개는 잔에 따르고 마동에게도 권했다. 마동은 자신의 잔에 있던 모스카토를 다 마시고 그녀가 내미는 와인을 받았다.


 “당신이 언제 나올까 궁금하지 않아요?”


 마동은 대답하지 않고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물기가 그대로인 는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는개의 눈동자는 그녀의 세계를 이루는 한 조각이었지만 그 조각 속에는 역시 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어떤 짓을 당한 것일까.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어린 는개의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생각하니 마음이 격분했다. 자의식이 칼을 들고 마동의 몸을 잠식하려고 했다. 마동은 통증을 참아내듯 자의식을 꾹 눌렀다.


 “이야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굳이 어려운 기억을 꺼낼 필요는 없어.” 마동은 또 한 모금의 와인을 목으로 넘겼다.


 이 술에 거부감이 없는 것은 어째서 일까. 색깔 때문일까.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어요. 내내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이에요. 우리는 꽤 오래전에 만났어요. 당신은 기억을 못 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는개의 눈은 결심을 말하려 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마동에게 어째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하며 이의성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금 안타까워하는 모습, 조금 슬픈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는개의 눈동자 속의 세계는 십여 년 전의 많은 기억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그 모습으로 마동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그때 소리를 지를 수도, 도망칠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새아빠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고 집에 가끔씩 와서 편안한 웃음으로 나에게 귀엽다고 한 마디씩 던진 남자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주택가의 골목에는 사람들이 전혀 돌아다니지 않았죠. 나를 겁탈하려는 그들은 시간과 장소를 물색했던 모양이에요. 나를 타깃으로 하고 말이죠. 배후에는 새아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확신은 있지만 증거 같은 것이 없었는데 그때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새아빠라는 남자가 주동했다고 믿게 되었어요.”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마동도 는개도 손을 대지 않아서 더욱 단단하고 엄숙했다. 는개의 눈은 와인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인 잔에 들어있는 와인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와인이 세계를 흩뜨리고 싶었던지 는개는 와인 잔을 돌렸다. 물결을 이루며 와인이 찰랑거렸다. 그녀의 볼은 처음보다 조금 더 붉어졌다. 그것이 와인 때문인지 기억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양쪽 눈썹은 다르지만 가지런하여 하늘을 수놓은 얇은 구름처럼 그녀의 눈 위에 고르게 붙어서 얼굴을 완성시키는데 일익하고 있었다. 증명사진에서 보였던 눈썹과는 달랐다. 눈썹은 자주 정리를 해줘야 한다는 소피의 말이 떠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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