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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7. 2020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

하루키 소설


요 며칠은 눈이 세상을 덮친 날이다. 바람은 앞에 칼을 장착하고 불어와서 볼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불어댄다. 클라라 주미 강 버전의 비발디 사계의 겨울을 강하게 듣는 기분이다. 마치 저 위에서 엘사가 화가 나서 고드름을 마구 뿌려대는 것 같다. 기이하게도 클라라 주미 강의 비발디 겨울은 그런 느낌이다. 클라라 주미 강의 얼굴은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았을 때 더 고혹미가 흐른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https://youtu.be/LYAJeLkkTvE

비발디 사계 '겨울' - 클라라 주미 강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어쨌거나 허락도 없이 겨울이 왔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왔다. 그에 맞게 하루키의 깜짝 선물 같은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한다. 이 단편은 ‘고독한 자유’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는 가장 판타지며 가장 재미있고 가장 하루키답지 않으면서 제일 하루키스럽다. 아주 기묘하며 만화적이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상상이 되는데 중간중간 기다렸다는 듯이 양사나이의 귀여운 삽화가 등장한다. 양사나이하면 '양을 쫓는 모험'에서 무겁고 축축하고 어두운 양사나이가 떠올라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양사나이의 이야기는 하루키 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하루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아주 좋아한다. 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소설에서 체셔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1973년의 핀볼'에서도 나오코가 웃음을 짓고 가버리고 나면 체셔처럼 그 웃음만 허공에 머물러 있다고 자세하게도 (나 하루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거든요, 흥) 써놨다.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도 체셔는 잊을만하면 튀어나온다. 와나타베 노보루처럼.

이 이야기 속에는 그간의 많은 소설에 등장했던 심각하거나 진지한 주인공들이 코믹을 장착하고 나온다. 양사나이를 시작으로 양박사(댄스 댄스 댄스)도 나오고, 208 209의 쌍둥이(1973년의 핀볼,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도 밝고 유머를 잔뜩 가지고 나온다. 그 외에 왼쪽, 오른쪽 꽈배기 사나이들과 바다 까마귀 아줌마 등 종합 선물포장마차다. 하루키의 이런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마음은 뜬금없지만 이순재가 떠오른다. 이순재는 1967년에 '대괴수 용가리'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용가리라고 해서 아이들 영화처럼 보이지만 또 재난영화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는 볼 수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 https://youtu.be/EAZd6K1fI6I

대괴수 용가리(1967년) 고화질&한글자막

67년도 필름인데 그 이후의 영화보다 세련됐고 무엇보다 70년대 흑백영화에 비해 이미 컬러영화다. 그 당시 기술력이 용가리를 촬영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일본의 고지라 팀이 도와줬다. 이순재가 박사로 나오는데 무려 신혼 첫 날밤에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이미 이 자체가 재난이다. 32살의 이순재 역시 아이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60년대에 용가리에 출연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지붕킥에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하루키는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아이로 남아있는 부분을 잘 풀어서 단편 소설로 만들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장편 소설에서 묵직하고 중압을 견뎌내야 했기에 하루키는 이 소설로 다시 불러내 모두 크리스마스를 즐기자고 하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양사나이의 저주를 풀어준다고 하지만 양사나이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재미있어한다. 그간 장편소설 속에서 뒷짐 지고 무게를 잡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버리는 기분이다. 


또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에는 도넛이 빠질 수 없다. 하루키 하면 또 도넛이 아닌가. 예의 중간이 뻥 뚫린 도넛에 갖은 철학과 문학적 양념을 집어넣어 버린 도넛. 그런 도넛이 잔뜩 등장하고 도넛을 잔뜩 먹으며 행복해한다. 으레 행복해야 하는 것이 크리스마스니까. 하루키는 도넛과 크리스마스와 양사나이를 결부시켰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이유의 시초가 1차 세계대전인가? 전쟁 중에 크리스마스에 대치하던 쌍방이 눈이 오니까 그 하루만큼은 휴전을 하고 서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축복했다는 이야기는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양사나이는 여차여차해서, 저주에 걸려 저주를 풀기 위해 이상한 곳으로 엘리스처럼 떨어지고 또 기어오르고 기괴한 모습들의 위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만나고 바다 까마귀 아줌마의 등에 올라타서 날기도 한다. 그리하여 결국 마지막에 문을 열어보니 모두가, 자신이 만났던 모든 이들이 양사나이를 위해 깜짝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해 준 것이다. 짜잔.


하지만 하루키의 속 마음을 어찌 알까. 조금만 비틀어서 생각해 보면 양사나이는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라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강치 이야기나 TV피플처럼 어른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하루키식 동화. 하루키식 애니메이션.

이걸 보면 '양을 쫓는 모험'의 양사나이는 멀어진다
이 정겨운 촌스러움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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