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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an 19. 2021

가자미 구이의 맛있는 부위는 몸통이 아니라

일상 에세이

가자미 구이 위에 백후추를 쏠쏠 뿌린다
적당히 잘라서 입 안에 넣어서 오물오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렇게 지느러미까지 오게 된다



가자미 구이를 하면 몸통 부분은 잘 발라서 어렸던 조카를 먹였다. 신중하게, 가시가 없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잘 발라서 조카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면 조카와 조카의 엄마와 조카의 외할머니 모두가 나에게 어떤 존경의 눈빛을 보였다. 사실은 살이 많은 그 몸통 부분이 크게 맛이 없어서, 나는 가시가 많은 지느러미가 아무래도 내 입맛에는 맞나 봐.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 모두가 평화로운 길을 나는 택했다. 


가자미 구이에 백후추를 쏠쏠 뿌려 잘 잘라서 먹으면 참 맛있다. 후추를 쏠쏠 뿌려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가자미 구이를 입 안에 넣어서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꼭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가자미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은 살이 많은 몸통 부분이 아니라 가시가 많은 지느르미 쪽 부분이다. 아주 부드럽고 기름기도 적당해서 후추와 잘 어울리며 자꾸 손이 가게 만든다. 단지 가시를 제거하고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몸통 부분은 가시는 없지만 지느러미 쪽 보다는 맛이 떨어진다. 


가자미 구이는 아버지가 좋아했다. 아버지는 가자미를 구우면 지금의 나처럼 몸통의 살을 잘라서 동생과 나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시가 많은 부분을 끙끙 발라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쪽이 훨씬 더 맛있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몸통을 발라서 먹였을 것이다.라고 애써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치킨도 터벅살 보다는 날개가 맛있고 돼지도 부속물이 더 맛있는 경우가 있다.


가자미 구이도 그런 연장선 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잘 구워진 가자미를 잘라서 오물오물 먹고 있다 보면 금방 사라지지만 이 짧은 시간은 좋아하는 시간이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시간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조금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혹독하네. 혹 독 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좋은 시간 약간을 만들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 이 서럽고 강하고 유약하면서 바늘 같은 대사는 가자미 구이를 먹고 있는 나에게 와서 박혔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가자미의 맛이라는 건 그저 가자미의 맛이다. 아버지가 밥 위에 올려 주었던 가자미 구이의 맛은 아니다. 그 속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밥을 먹었던 추억이 기억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서 오는 맛은, 지금의 지느러미의 맛있는 부분의 맛이 아니라 추억 속 몸통의 맛이다.


내가 만약 아버지가 된다면 내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매일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 할 자신이 없다.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건 지구가 도래한 이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극히 평범해서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유튜브로 ‘시골 가족’의 식사를 보면 마음이 편하다. 지금의 유튜브는 돈을 벌기 위해, 불빛을 보면 달려드는 나방 같은 인간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이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도 모르는 유튜버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을 가지고 조회수를 올리는 인간도 있고, 죽은 아이와 영적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조회수를 올리는 인간도 있다. 이미 시궁창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된 곳이 유튜브다.


나방이 하늘을 덮어버린 곳이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나비는 있다. 시골 가족 유튜브는 한 가족이 둘러앉아 그저 식사를 할 뿐이다. 과하거나 축소나 확장 없이 한 가족이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 소박한 밥 한 끼를 먹을 뿐이다. 시골 가족의 밥상에는 강요가 없다. 엄마가 미역국을 금세 먹고 나면 막내가 많이 남은 자신의 미역국을 엄마에게 건네준다.


이 소박하고 조용한 한 끼 밥상을 보는 것으로 봉인되어 있는 내 추억이 실타래가 풀리듯 열리게 된다. 내 아버지는 평일의 저녁은 어떻든 가족과 함께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도 늘 밥상에 빙 둘러앉아 같이 먹었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종종 나갔다. 동생의 손을 잡고, 놓칠세라 꼭 쥐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어느 광고에서 '마중'이란 '마음이 오는 중'이라고 하던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버지가 오는 버스의 번호를 맞춰가며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작업복 남자들을 유심히 보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리면 동생은 뛰어가서 안겼다. 그리고 저녁은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그 속에 가자미 구이가 자리 잡고 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떡국에서 오르는 김이 꼭 하얀 실뱀장어처럼 보였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어머니는 마른 김에 밥을 싸주었다. 어린이였던 우리는 그걸 간장에 좀 찍어서 먹었다. 떡국을 좀 떠먹고 동생은 뭐라 뭐라 종알종알거렸다. 그리고 밥 위에 가자미 구이를 아버지가 올려주었다. 한 입, 두 입. 그렇게 먹는 동안 우리는 성장했고 어른들은 쪼그라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늘 신파로 흘러가지만 추억은 조금 신파여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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