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장편소설
장편소설 ‘애프터 다크‘는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영어 제목으로 사용하기 좀 그랬던 것 같다.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도 참 좋다. 그렇지만 뭐랄까 영어로 된 제목인 ‘애프터 다크’와는 조금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장편 소설 속에는 우리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등장한다. 그것이 눈에 드러나는 폭력이기도 하지만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도 있다.
어둠의 저편에는 검고 말랑말랑 한 폭력이 있다. 아사히 에리라는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기 식의 자아가 생성되어 버려 그만 어른 세대의 착한 폭력에 길들여졌다. 영화 ‘소리도 없이’의 초희가 그렇다.
그렇지만 ‘애프터 다크’는 밤의 어둠 그 후에는, 폭력으로 얼룩진 어둠이 지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폭력의 흔적이 전혀 없다. 꽃과 평화와 안온 감이 그 자리에 대신한다. 그리고 어둠이 도래하면 또다시 그 자리는 폭력으로 물이 들고 만다. 이는 곧 이 세계에서 폭력이 없는 곳이 없으며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어디에도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가을의 전설’의 원제가 ‘리젠드 오브 더 폴‘인데 여기에서 ‘fall‘이 가을인 어텀이 아니라 한 가족의 몰락을 말하는 거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프터 다크’나 ‘어둠의 저편‘이나 폭력에 관한 제목으로 아주 딱 맞아떨어지지만 살짝 벌리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의 질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어둠의 저편에는 착한 폭력으로 죽어간 카펜터즈의 카렌이 당한 폭력이 있고, 애프터 다크에는 주먹질을 당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중국 여자가 겪은, 드러나는 폭력이 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깔린 곳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다카하시가 법학도로 법원에 공개방청을 가서 받은 기묘한 느낌에 대해서 우리는 한 번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한다.
법원에서 폭력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재판소에 다니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법정이 돌아가는 꼴에 의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죄인들과 다카하시 자신, 나 자신과 그들을 갈라놓은 벽이란 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벽이 있다고 해도 허술할 뿐이다. 결국 나 역시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고 만다.
어둠의 저편이든, 애프터 다크든, 아무튼 좋은 소설이었다. 번갈아 가며 읽으면 번역이 조금 다른 부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요컨대 ‘~~~ 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 해야만 한다’ 같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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