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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23. 2021

애프터 다크

하루키 장편소설


장편소설 ‘애프터 다크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영어 제목으로 사용하기  그랬던  같다.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도  좋다. 그렇지만 뭐랄까 영어로  제목인 ‘애프터 다크와는 조금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장편 소설 속에는 우리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등장한다. 그것이 눈에 드러나는 폭력이기도 하지만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도 있다.


어둠의 저편에는 검고 말랑말랑 한 폭력이 있다. 아사히 에리라는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기 식의 자아가 생성되어 버려 그만 어른 세대의 착한 폭력에 길들여졌다. 영화 ‘소리도 없이’의 초희가 그렇다.


그렇지만 ‘애프터 다크’는 밤의 어둠 그 후에는, 폭력으로 얼룩진 어둠이 지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폭력의 흔적이 전혀 없다. 꽃과 평화와 안온 감이 그 자리에 대신한다. 그리고 어둠이 도래하면 또다시 그 자리는 폭력으로 물이 들고 만다. 이는 곧 이 세계에서 폭력이 없는 곳이 없으며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어디에도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가을의 전설’의 원제가 ‘리젠드 오브 더 폴‘인데 여기에서 ‘fall‘이 가을인 어텀이 아니라 한 가족의 몰락을 말하는 거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프터 다크’나 ‘어둠의 저편‘이나 폭력에 관한 제목으로 아주 딱 맞아떨어지지만 살짝 벌리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의 질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어둠의 저편에는 착한 폭력으로 죽어간 카펜터즈의 카렌이 당한 폭력이 있고, 애프터 다크에는 주먹질을 당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중국 여자가 겪은, 드러나는 폭력이 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깔린 곳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다카하시가 법학도로 법원에 공개방청을 가서 받은 기묘한 느낌에 대해서 우리는 한 번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한다.


법원에서 폭력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재판소에 다니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법정이 돌아가는 꼴에 의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죄인들과 다카하시 자신, 나 자신과 그들을 갈라놓은 벽이란 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벽이 있다고 해도 허술할 뿐이다. 결국 나 역시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고 만다.


어둠의 저편이든, 애프터 다크든, 아무튼 좋은 소설이었다. 번갈아 가며 읽으면 번역이 조금 다른 부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요컨대 ‘~~~ 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 해야만 한다’ 같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라카미하루키 #하루키 #하루키소설 #장편소설 #어둠의저편 #애프터다크 #AfterDark #MURAKAMIHAR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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