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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08. 2021

죽고 난 뒤의 팬티

일상 에세이

마우스로 그려본 추상화.라고 우기는 그림


버스에서 내리다가 패딩이 버스 문에 걸려 뒷바퀴에 치여 죽음으로 간 20대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버스 문이 닫힐 때 옷이 끼여 죽음의 순간을 본 많은 사람들 역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직 많은 경험을 해보지도 못한 채 이렇다 할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딸의 소식을 들은 부모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라서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의 생활은 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나날들의 연속일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로 인해 죽음으로 갔다면 준비기간과 몇 번의 결락과 후회 그리고 눈물을 흘리기라도 했을 것이며 어딘가를 향해 욕이라도 했을 텐데. 죽은 여성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고 하고자 하는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얘가 왜 이렇게 오지 않지, 또 머리 만진다고 또 늦은 건 아니야, 같은 사소한 불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의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하루에 600명씩 죽는 일상 속에서 누구 하나 이렇게 죽는 것이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600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은 사람들에 속할 것이다. 문득 오규원 시인의 시 ‘죽고 난 뒤의 팬티’가 떠올랐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집 뒤의 어스름한 호수에서 사람이 죽었다. 엎드려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젊은 사람이 생을 마감했다. 다리와 팔을 밑으로 죽 내리고 얼굴은 땅과 맞붙어 버렸다. 경찰이 오기 전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어 숙덕 숙덕거렸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손톱의 때에 대해서 말을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다. 나 죽은 다음의 내 청결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그때도 문득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에서 시인은 어쩌자고 죽은 다음의 팬티에 대해서 이리도 신경을 쓰는가. 그게 뭐라고, 나 죽으면 끝이지 그 후의 일까지 일일이 생각한다면 살아가는 일도 버거운데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라고 생각했던 나를 책망했다. 시인은 마지막에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지 없기는 하지만’라며 그것마저 유머로 승화를 시켜버렸다.


세상사 모두를 대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은 대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이 사회는 개개인에게 부여해야 한다. 집 안에 불이 나도, 자동차 사고가 나도, 물에 빠져도, 이 사회는, 이 사회의 시스템은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는 사고사가 되기 직전까지는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쥐어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이니까.


작년에 나는 친구의 죽음을 보았고, 자식도 남편도 없었던 내 큰 이모의 죽음도 보았다. 이전에 유난히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보냈다. 누군가 죽어서 떠난다는 것이 시간이 하루 이틀만 지나면 썩 와 닿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태어나듯 죽음도 어느 날 문득 찾아온다.


요즘은 누우면 그대로 잠이 들어 꿈도 꾸지 않고 아침까지 자버린다. 눈을 뜨고 지내는 동안 피곤하게 보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을 늘 꾸었고 여러 번 깼으며 잠들기까지의 터울이 길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하나 둘 셋 하면 잠이 깊게 들어 그대로 깨지 않고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뜨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어떻든 지금 적고 있는 긴 소설은 다 적어서 올려놓고 싶다. 죽음은 그 이후에 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먼 북소리’에서 이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형태의 죽음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라고 했다. 참 맞는 말인데 너무 맞는 말이라 거짓말 같다. 죽음이란 그렇다. 죽음은 늘 거짓말 같다. 그리고 죽음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하루키는 늘 기도를 한단다. 신을 썩 믿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기도를 참 많이 한다. 옆을 보고 운전하던 피아트 운전자가 횡단보도에서 나를 들이받지 않도록, 경찰이 길모퉁이에 서서 이야기하며 무심코 앞뒤로 흔들고 있는 자동소총이 나를 향해서 발사되지 않도록, 아파트의 5층 베란다 난간에 위태롭게 진열된 화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정신이상자나 마약중독자 같은 사람이 갑자기 착란을 일으켜 내 등에 푹 하고 칼을 찌르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사고 나지 않고 죽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에 아마추어로서 오랜 기간 써 놓은 장편 소설을 매일 정리해서 올리고 있다. 이 장편 소설을 다 올리는 동안에는 죽지 말았음 한다. 아마추어지만 소설을 적을 때는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것 같다. 누워서 잠들면 그대로 일어나지 않고 죽음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요즘은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일 년 전에 그간 써 왔던 장편소설을 매일 워드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정리를 해서 올리고 있는데 이 소설을 다 올릴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게 해달라고 하루키처럼 신도 믿지 않으면서 뻔뻔하게 기도를 하기도 한다. 피츠제럴드는 마지막 작품을 쓰는 도중에 읔 하며 쓰러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미완성인 채로. 저기까지만 가면 피츠 제럴드는 끝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죽음이 찾아오고 말았다.

장편소설을 일단 다 썼을 때 200자 원고지 5000매 정도가 되었다. 그걸 프린트를 한 번 해봤는데 굉장한 양이었다. 장편소설을 써서 이곳에 다 올려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긴 소설이 쓰고 싶었고 한 번 적어보자고 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게 몇 해 전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끝이 보인다. 장편 소설을 다 올리는 동안에는 역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있고 싶다. 그것은 정말 간절하다.

어제는 미세먼지가 가득한데도 조깅을 하면서 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 사람들과 나는 100년 후에는 사라지고 없다. 다 죽고 없다. 따지고 보면 이 글을 보는 사람, 지금 운전하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똥을 누는 사람, 갓 태어난 사람, 밥을 먹는 사람 모두가 100년 후에는 다 죽고 없다. 조깅을 하면서 맞이한 빛과 마신 먼지는 100년 후에도 그대로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다. 죽음이란, 인간의 죽음이란 그렇다. 


하지만 100년 동안은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으니 각자 나름대로 컬러를 가지고 색이 반짝이도록 생명을 불어넣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모두가 지금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지만 일탈이 길어지면 당연하듯 일상을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이 따뜻한 단조로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 장편 소설을 쓰는 것이 쓸데없지만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하고 싶다. 역시 간절하게.


얼굴도 모르고, 사람들이 다 잊었을, 버스 문에 끼여 죽음으로 간 그 여성에게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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