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쓴 일기 같은 글
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하늘이 잿빛이면 오후가 되어서도 오전 10시 37분 같은 기분이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 패치카에서는 미미한 열을 뿜어내고 마시는 커피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고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알 수 없는 팝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오전의 사각거림이 오후가 되어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날이 하루 종일 흐리다고 해도 흐린 날에 늘 이런 기분은 아니다. 겨울이거나 겨울에서 봄으로의 경계에 있는 날, 그런 날이 하루 종일 흐려야 오후가 되어도 오전의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이 이어지는 것이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계절의 이런 날은 언제나 좋다. 보통적인데 평면적이지 않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곧 울어버릴 것 같은 5세 아이의 얼굴처럼 보인다. 날이 흐리면 고요가 대기에 침잠하고 그 많던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사색은 날씨에 기인한다. 깊은 사색을 하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꾼다.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전부 총을 들고 다니며 서로를 죽인다. 총을 맞은 사람은 몸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만다. 꿈이지만 충격적이다. 나만 총이 없다. 그런데 나만 살아남고 모두가 죽는다. 죽어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나는 죽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꿈이다. 고립 속에서 홀로 영영 살아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어쩌다 죽고 우리는 어쩌다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살아가고 있기에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선 안 된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에 비해 예고된 비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 그것이 뭐야?라고 물어봐도 대답할 길은 막막하다. 하지만 2월 말에 내리는 비는 3월 초에 내리는 비와도 다르고 1월 말에 내리는 비와도 다르다. 2월 말에 내리는 비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비의 느낌은 아니다. 그렇지만 독특한 무엇이 있다. 2월 말에 내리는 독특한 비는 잿빛 하늘과 메마른 도시와 표정 없는 자동차들을 차갑게 적신다.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라고 해봐야 그런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비는 세상을 적신다.
랄프로렌을 잔뜩 입고 나왔던 ‘애니 홀’의 다이안 키튼이 떠오른다. 그런 애니를 보며 올비가 말한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자면, 인생은 호러블 한 것과 미저러블 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 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예를 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 그리고 음, 미저러블 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 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지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심연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러운 먼지처럼 퀴퀴한 느낌일 때도 있고 폭신한 솜사탕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딱딱해서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안정된, 그런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싸구려 스킨 냄새가 난다. 후퇴한 시간의 냄새가 2월의 끝물에 흐린 바람을 타고 풍겨온다. 싫지 않은 냄새. 좋은 냄새는 아니나 나쁜 냄새도 아니다.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고 아버지 등에 붙어있던 작업복 냄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