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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9. 2021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419

14장 6일째

419.


 두 사람을 시샘하듯 검은 비가 바람에 날려 베란다의 창에 심술궂게 떨어졌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그래.”


 마동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는개는 마동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마동은 작은 상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통장이 들어갈 만한 직사각형의 네모난 사각형의 아무런 무늬가 없는 재미없어 보이는 상자였다. 는개는 작은 상자를 받아 들고 2초 정도 상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알았다는 듯 마동을 쳐다봤다. 마동은 는개에게 회사에서 열어 보라고 했다. 는개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받아 든 상자를 그녀의 가방에 넣었다.


 상자에는 통장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마동은 와인을 마시면서 는개에게 편지를 썼다. 마동은 이미 오래전에 편지를 한 번 써본 기억이 있었지만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인사를 어떤 식으로 먼저 꺼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편지지를 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펜을 들고 편지지를 노려봤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편지라는 건 어떻든 첫 시작의 문을 열게 되니 문 안으로 난 길을 걸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는개에게 하고 싶은 말은 편지지에 써지기를 바랐다. 마동은 비교적 꼼꼼하고 정확하고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과 부탁과 는개에 대한 마동 자신의 생각을 침착하게 적었다. 잘못 적었거나 오타가 났거나 하면 마동은 옆에 다시 똑같이 한 번 더 적었다. 하지만 편지지가 한 장을 넘어서니 오타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적어나갔다. 손가락을 통해 활자는 춤을 추듯 편지지에 그림을 그렸다.


 소피에 대해서 어떡하면 는개가 오해하지 않고 읽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사실대로 적으면 된다는 결론에 따라서 소피에 대해서도 적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 되게 적는데 공을 들였다. 소피의 가슴수술을 위해서 돈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단 소피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지 않게끔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는개는 잘 알아서 할 것이다. 나보다 현명하고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니까 소피에게도 잘 전달하고 나머지 일도 내가 술렁술렁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전 저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알아요”라고 는개가 핸드백을 보며 말했다. 마동은 그녀의 말에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는개는 이렇게 세차게 내리는 검은 비와 일간에 터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마동은 지금 쏟아지는 검은 비와 어두운 자줏빛 구름과 사건에 관계가 깊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는개에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시작된 일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알지는 못했고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마동은 알고 있었다. 역시 는개는 알지 못한다. 는개와 마동 사이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몇 겹의 막이 한정적으로 쳐있었지만 마동은 그것을 거둬낼 생각은 없었다. 모르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지는 의사가 한 말처럼.


 “당신은 어디론가 없어지려 하는 거죠? 엊그제 밤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완전히 어딘가로 떠나려 하는군요.” 는개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난 매일 달리면서 나 지신을 이기려고 했어. 나 지신을 이기는 길은 매일 조금씩 달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 안에는 뚜렷한 명제라든가 공식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는 건 아니었어. 그동안 난 나를 죽 버리면서 살아왔어. 하지만 사소한 것들이 버려지지 않았어. 아주 작은 것들인데 버려지지가 않아. 나는 버리는 것을 훈련하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 난 어떤 의미에서는 바퀴벌레보다 못한 인간일지도 몰라.”


 마동의 목소리는 10월의 그리움처럼 변함없는 톤을 유지했다. 는개는 다시 마동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더 냉정해진 손바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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