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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19. 2021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428

14장 6일째

428.


 와그작와그작.


 단서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 풀지 못한 살인에 대해서, 정신이 나가버린 시체의 부인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항변이라도 하듯 류 형사는 얼음을 큰 소리로 깨물었다. 저렇게 힘 있게 얼음을 씹다가 치아가 나갈 것 같았다.


 마동은 류 형사에게 봉투를 하나 건넸다. 류 형사는 마동이 꺼낸 봉투에 시선을 두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류 형사는 봉투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었다. 봉투를 보니 신장이 망가진 채로 태어나 병실에서 아빠를 절박하게 부르는 딸의 모습을 뒤로하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크고 맑은 눈동자의 수빈이를 생각하니 류 형사의 눈동자도 심하게 떨렸다. 류 형사는 봉투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류 형사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존심을 지키자니 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고통에 찬 수빈이의 얼굴이 류 형사의 마음을 덮쳤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견뎌내고 있는 수빈이를 생각하니 자존심 같은 것은 쓰레기봉투에 구겨 넣고 싶었다.


 류 형사는 얼굴을 들어 마동을 바라보았다. 앞에 앉아있는 이 청년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스타일을 어느 정도 간파해낼 수 있다. 물론 경력에 따라, 경험에 쌓인 사람에 한해서지만.


 류 형사는 평소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신 앞에 앉아있는 마르고 표정이 없는 이 청년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점점 더 깊은 기이한 의문점만 들었다. 청년은 깊은 상실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람들과는 다른, 너무 선명한 우주공간 속의 맑음도 보였다. 생명수라고 불리는 암반의 저 끝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처럼 신비로운 맑음이 이 청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맑음은 하지만 무서운 것이다. 너무 맑고 깨끗해서 깊이를 알 수 없었고 관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비논리적이었고 비현실적이었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희망은 그 속에 있었고 확실한 냉철함이 ‘맑음’ 속에 있었다. 이 청년의 무표정 너머의 세계를 류 형사는 직관으로 꿰뚫어 보려고 해도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있어서 유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의심을 접었다. 류 형사에게 마동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이 지니고 있지 못한 본질을 지닌 영역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청년의 주위에 감돌고 있는 기이한 기류를 류 형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표정하고 기이한 청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사고가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마동의 얼굴과 대면하고 있다가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류 형사의 한 손은 이미 봉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봉투를 쥐었다.


 “”형사님, 오늘 밤에 떠나려고 합니다. 몸이 보기보단 좋지 않습니다. 격리되어있는 전문병원에서 요양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식어버린 커피와 차갑게 쏟아지는 비와 무서운 소리를 내는 천둥과 충격적인 번개는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마동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할 때는 몰랐지만 식어버린 커피는 겨울을 봄으로 착각하고 잘못 나온 잡초를 으깬 맛이 났다. 잠시의 틈이 있었다.


 “제 인생을 얘기하자면 바퀴벌레처럼 하찮고 단순하고 눈에 띌만한 시간이라곤 저에게 없었습니다, 형사님.” 또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전 그동안 제 자신을 버리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그토록 버리려고 했는지 제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버리려고 한 것이 나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던 텅 빈 시간이었는지, 그 텅 빈 시간을 채웠던 기억이었는지, 어느 것 하나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하나씩 떼서 버리는 게 조화와 균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마동은 류 형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했다. 류 형사는 마동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힘을 더 주면 귀가 벌겋게 변할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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