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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2. 2021

현기증

하루키 에세이 중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디제이가 자신의 친구가 거구에다가 운동도 잘하는데 벌 한 마리에 그렇게 무서워한다고 했다. 벌이 어딘가에서 이잉 나타나면 어린이처럼 무서워서 공포에 떤다고 했다.


하루키도 고소공포가 있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건 질색팔색을 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을 때는 난감하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높은 곳에서는 덜하지만 인공적인 곳, 아파트의 고층이나 빌딩의 고층은 공포라고 했다. 그래서 높은 곳을 좋아하는 자신의 아내는 늘 높은 곳에 가면 팔짝팔짝 뛰면서 즐거워해서 꼭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하루키는 공포심도 재산의 하나라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대단하다든가, 느끼면 형편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단면적인 단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


공포라는 건 질이 분명 다르고 같은 질의 공포라도 깊이가 달라서 옆의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공포를 내가 느낀다고 해서 그게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벌레를 무서워하고 벌레를 보면 공포를 느끼는 건 인간의 신체 생김과는 별개의 문제다. 또 갇힌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 역시 튼튼하게 생긴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사람은 운전을 할 때 옆에 엄청 큰 덤프트럭이 있으면 굉장한 공포를 느끼는데 또 다른 어떤 이는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병적인 유전적 요인에게 공포를 느낀다.


공포라는 건 사람의 얼굴처럼 다 달라서 공포를 느끼는 것 역시 전부 제각각이다. 나도 고소공포가 있어서 밑이 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밑이 훤히 보이는 높은 곳에 서면 굉장한 공포를 느낀다. 바이킹도 무서워서 한 번 타고서는 이런 걸 왜?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바이킹을 타는 것을 무서워하면 주위에서는 꼭 바이킹을 태워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남이섬에서 번지점프를 한 번 뛴 적이 있다. 아마 뛸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높은 55미터였다. 66미터 번지점프가 이후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660미터든, 77미터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루키의 아내가 높은 곳을 좋아해서 하루키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는 것처럼 나 역시 그때 여자 친구가 높은 곳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해서 같이 뛰기로 했다. 아마 한 달 전부터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번지점프는 계산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 공포를 유발하는 것들이 있다. 요컨대 잘못되어도 어쩌구 하는 서명을 해야 하고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전부 빼야 한다. 주머니에 콘돔이 있다면 미리 치워놓기를 바란다. 안경도 벗어야 하고 시계나 반지 같은 것들은 다 빼야 한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간다. 천천히 올라가는데 땅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다. 다 올라가면 조교가 이런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여자 친구가 먼저 뛰었는데 하나 둘 셋 하는 동시에 망설임도 없이 꺅하며 뛰어내렸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점프대에 서면 조교가 발뒤꿈치를 탁탁 쳐서 점프대의 끝선에 맞물리게 한다. 그건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공포다. 바로 밑은 시퍼런 호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바람은 계속 분다. 돌아서서 내려가고픈 마음이 120퍼센트 든다. 조교는 앞만 보며 뛰어내리라고 하지만 자꾸 밑을 보게 된다. 밑을 볼 때마다 공포는 점점 크고 넓어진다. 까마득한 호수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공포 그 자체였다. 다리에 생명줄을 묶지 않고 허리에 묶어서 무서움이 덜 할 거라고 조교는 말하지만 그런 말 따위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뛰어내리기까지 몇 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어떻든 뛰어내렸다. 호수 바닥이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관성 때문에 위, 간 따위의 내장은 이 자리에 있으려 하는데 몸은 중력이 당기는 엄청난 힘에 의해 밑으로 빠르게 처박힌다. 으 하는 이상한 기분. 그러다가 순간 끝난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반동 덕분에 다시 튕겨 올라 밑으로 다시 떨어진다. 반동이 줄어들면서 무서움도 조금씩 완화된다. 반동이 끝나면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식인종 같은 존재에게 묶여 있는 것처럼 공중에 그대로 매달려 있다. 그러면 보트가 노를 저어 내 밑으로 온다. 그리고 긴 봉을 나에게 뻗는다. 나는 그 봉을 잡고 보트 위에 내려간다. 이런 가내 수공업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마지막까지 공포를 이어간다.


번지점프는 이후로 지금까지 더 이상 뛴 적은 없지만 제주도에서 또 한 번 비슷한 공포를 느낀 적이 있었다. 모두들 그것을 레저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저 공포체험 같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보트에 줄을 묶고 하늘에 20미터 떠서 낙하산을 타는 것이다. 역시 굉장한 공포였다. 밑으로 보이는 검푸른 바다와 바다의 바로 밑에서 너울거리는, 사람보다 더 큰 해파리떼.


보트가 속도를 줄였다 높였다 하기 때문에 밑으로 떨어졌다가 올라갔다가를 반복한다. 사실, 어쩌면 이게 번지점프보다 더 무섭다. 번지점프는 순식간에 끝이 나기 때문에 공포의 시간이 짧은데 이건 지속된다. 보트에서는 피규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나는 미칠 것 같다. 발이 바다에 빠질 것 같은데 밑에는 바다보다는 무시무시한 큰 해파리의 투명한 등이 보이는 것이다. 아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지금 다시 돈을 주며 하라고 해도 사양이다.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번지점프를 한 번 뛰었다 해서 높은 곳의 공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아주 가끔이지만 그런 생각은 한다. 뭔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고, 하기 싫다고 해서 피하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다른 식으로 보면 하나의 과정으로 부화뇌동하지 않게 하는 동력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포를 가지고 놀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슈퍼맨도 클립톤을 무서워했으니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공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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