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야기
편육은 정말 우리나라에만 있는 음식이 아닐까 싶을 만큼 한국적이다. 사실 한국적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편육은 잡채처럼 보통 잔치집이거나 장례식장에서나 먹을 수 있어서인지 편육에 대한 내밀한 기억들은 아마도 ‘어른'이나 ‘잔치’ 내지는 ‘외가’ 같은 단어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족발은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또 편육은 잘 볼 수 없다. 편의점에서 편육을 팔지만 나는 아직 편의점에서는 편육을 사 먹어 보지 못했다. 시장의 족발집에서 편육도 같이 만들어 파는 경우가 있는데 매일 나오는 족발에 비해 편육은 뜨문뜨문 올라올 뿐이다.
사진의 저것은 닭발 편육이다. 아파트 앞의 중형마트에서 파는데 매일 나오지 않으며 어쩌다 가끔 나온다. 그래서 나오면 마트에서 연락이 온다. 어쩌다 보니 마트와 그런 관계가 되었다. 편육이 먹고 싶어 한 번 사 먹고는 계속 찾으니 마트 측에서 나오면 연락을 준다. 관계라는 건 강 사이에 놓인 다리처럼 전혀 왕래가 없을 것 같은 저쪽과 이쪽을 연결시켜준다. 그러다 보면 편육을 사러 가서 이것저것 수다를 떨곤 한다. 어쩔 때 나를 내가 보면 전혀 나 같지 않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닭발 편육은 돼지편육과는 좀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면 닭발 맛이 난다. 또 보통의 편육과는 다르게 매콤하다. 내 입에는 꽤 맵다. 거기에 썰려있지 않고 통 짜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사들고 와서 직접 썰어서 먹어야 한다. 나처럼 귀찮음이 가득한 인간이 썰면 사진에서처럼 굵게 썰어서 먹게 된다. 볼이 볼록하게 되어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맛있음을 두 배로 올려준다. 아쉬운 점은 자주 사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편육은 이인자의 느낌이다. 늘 족발에게 일인자의 자리를 내주면서도 이인자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인자의 자리로 오르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가끔 이렇게 매콤함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족발을 사 오면 달려드는 가족에 비해 편육은 또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의 술안주로도 좋다. 편육에 대한 추억은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편육을 접하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분명 잔치하는 집에서 먹어 봤을 것이다.
예전에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갓집에 가서 편육을 먹었는데, 친구는 종손에 장손이었고 상갓집은 경주 양남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마을에 있는데 마을 전체가 무슨 무슨 파로 한 마을 사람들이 다 친척이 되는 아주 큰 집안이었다. 그곳의 대들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대대적인 상을 치렀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마당의 한편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직접 만들었다. 편육도 직접 만들어서 먹다 보면 돼지의 털이 덜 뽑혀 입에서 막 씹혔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편육을 몇 접시나 먹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어른들도 편육은 잘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편육 특유의 식감과 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나에게 편육을 이만큼 싸주기도 했다.
야호 하며 집에 들고 와서 먹으니 또 현장에서 시끌벅적하게 먹었을 때만큼 맛이 나지 않았다. 기묘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식당에서 맛있게 먹는 음식을 똑같이 포장해서 집으로 와서 먹으면 식당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식당에는 은은한 조명과 식당 안에 퍼지는 맛있는 냄새, 테이블마다 행복하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음식 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여자들이 왜 분위기 있는 카페나 식당을 가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되었다.
편육 전문식당도 있으면 참 좋겠지만 없다. 아무튼 편육은 이인자다. 이상하게 편육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다. 자취를 할 때에도 족발이나 편육은 술안주로 먹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잘 먹지 않았고 사진을 찍는다며 타지방을 하릴없이 돌아다닐 때에도 각 도시의 전통시장에서도 편육은 사 먹지 않았다. 없어도 그만인 음식이 편육이다. 편육 같은 음식도 세상에 아주 많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편육을 만들어 팔고 어떤 사람은 편육을 사 먹는다. 닭발 편육을 먹고 있으면 이 도시의 시내 중심가에 유명한 닭발집이 있는데 거기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 장사를 했다. 처음의 닭발은 닭발 본연의 모양이었다. 뼈가 다 붙어 있는 닭발이었다. 닭발은 연탄에 구워서 판다. 그래서 연탄의 불맛이 닭발에 스며들어 아주 맛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해서 공간을 넓혔다. 공간의 벽을 부수고 그 뒤를 뚫었다. 그러면서 닭발 주인의 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닭발집에서 일을 하더니 며느리, 또 다른 아들, 이렇게 해서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안주도 하나둘씩 늘어났고 닭발도 뼈가 없는 닭발도 생겨났다. 이제 닭발은 체계적으로 구워서 판다. 한쪽에서는 초벌구이를 열심히 하고, 옆에서는 주문이 오면 한 번 더 구워서 테이블로 나간다.
참 이상한 게 규모가 커지고 메뉴가 늘어나면 이상하게 더 이상 안 가게 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초반의 맛도 변한다. 근간에 한 번 가서 먹을 때는 추세에 따라가서 그런지 너무 매웠다. 여성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매운맛이었다. 그래서 여자 손님들이 많다. 여자 손님들이 많으면 남자 손님들도 많아진다. 따지고 보면 그 집은 그대론데 우리가 변한 것이다. 단지 우리는 변화하지만 변함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인간은 이런 사소한 것에는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닭발 편육은 가끔 이렇게 먹는 맛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