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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7.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7

단편소설




 기차는 산속으로 비스듬한 길을 잘도 올라갔다. 그렇지만 평지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한 것에서 여지없이 벗어나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바로 나뭇가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기차의 창문은 오래 전의 것으로 창문을 올리면 십 센티미터 정도만 올라갔다. 더 이상은 위험해서 올라가지 않았다. 고양이가 빠져나갈 정도로 올라간 창문 틈으로 산속의 차갑고 상쾌한 겨울의 내음이 기차 안으로 확 들어왔다. 그리즐리도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나무의 냄새는 아주 좋았다. 죽어있지 않은 생동감이 무럭무럭 느껴지는 냄새였다. 이렇게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산속의 나무들은 견디고 있었다. 만약 돌을 괄태충에게서 찾아오지 못한다면 그런 나무들도 전부 죽어버릴 정도의 추위가 닥친다니.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겨울의 아침 공기에 몸이 떨린 것인지, 괄태충 때문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겨울의 차디찬 기운이 몸을 얼어붙게 만들지만 정신은 번쩍 뜨이게 하는 겨울의 차가운 맑음이 창문의 틈으로 4번 타자의 타구처럼 들어왔다. 기차는 산 위로 계속 올라갔다. 올라 갈수록 1월 달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여봐란듯이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을까.


 기차는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수도꼭지의 물줄기가 좁아지듯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더니 멈추었다. 미미한 미동도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는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살면서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시험 시작 전, 발표가 나기 전, 어렵게 이어진 소개팅을 하기 바로 직전, 중요한 전화를 받기 전, 늘 그런 기분이었다. 그저 긴장되는 기분 그 이상의 기분.    


 어째서 소멸하지 않고 잊을만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상황이 닥치는 것일까.     


 "함고동 씨,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자." 하며 의자에서 일어날 것을 그리즐리는 권유했다. 결전의 시간? 그동안 살면서 몇 번의 그런 순간이 있었지만 그 순간에 결전의 시간이라는 말을 대입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리즐리의 입에서 결전의 시간이라는 말을 들으니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지금 상황이 실제인지, 이곳에 있는 자신이 실재인지 구분도,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히 꿈이지 않을까 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또 한 번 있는 힘껏 괴롭혔다. 살며시 괴롭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마 양쪽의 허벅지에 '로어셰크'의 가면에 생기는 얼룩처럼 멍이 들었을 것이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함고동 씨. 당신은 저를 도와서 당신의 나라를 구하는 겁니다. 당신이 구한 나라는 당신이 오랜 후에 사망하고 나면 또 다른 당신이 나타나서 당신의 나라를 또 구하러 올 겁니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하는 겁니다. 유전자처럼 대물림되는 것이죠. 당신이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자 어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내일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그리즐리를 따라서 기차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기차의 한 칸은 어쩐지 초라하고 작아 보였다. 그저 작은 승용차만 한 크기처럼 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날이 조금 밝아진 사이, 밖에서 보는 그리즐리의 몸은 정말 컸다. 이렇게 큰 곰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리즐리보다 괄태충이 크다면 도대체 그 크기가 얼마 큼이란 말인가. 그는 상심이 쿵 하며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리즐리는 길을 아는지 고개를 돌려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대한 곰이 인간처럼 걸었지만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곰은 네발로 걸어야 하지만 그리즐리는 두발로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청량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었다. 그리즐리는 자주 와본 곳처럼 산속의 길을 잘도 헤치며 길을 걸었다. 


 "그리즐리 씨? 그리즐리베어 씨? 그런데 길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겁니까? 저 만약 그리즐리 씨와 헤어진다면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는 겨우 말을 했다. 숨이 여름을 훌쩍 지난 계절에 비행하는 모기처럼 위태했다. 


 "곰의 본능입니다. 동물에게는 본능이 강해서 동물 감각이 본능에 움직이게끔 프로그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함고동 씨, 당신도 위험이라는 큰 벽과 맞닿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 벽을 파괴하는 본능이 나오게 됩니다. 함고동 씨도 그러한 본능이 일깨워질 겁니다. 누구에게나, 인간에게나 곰에게나 그 본능이나 본성은 깨어나기 마련일 때가 있지요."    


 정말 곰이 맞을까.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곰이 아닐까. 아니면 외계인이거나 곰의 모형을 뒤집어쓴 사람이거나……. 외계인이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그래, 곰이 분명해. 곰이야.    


 그리즐리는 산 위로 계속 올라갔다. 그는 거대한 곰의 등을 보며 한눈팔지 않고 따라 올랐다. 운동을 하지 못한 탓에 겨울임에도 땀이 샘처럼 흘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즐리가 걷는 속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한눈을 팔거나 집중을 하지 않았다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산에는 마른 나뭇잎이 바닥을 점령했고 때때로 얼어붙은 작은 눈이 밟혀서 기도비닉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무들은 겨우내 영양분을 못 빨아먹었는지 뼈다귀처럼 앙상하게 말라서 보기 흉했지만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개체수가 상상 이상이어서 나름의 빼곡한 자연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움막 같은 곳도 지나쳤다. 아마도 사람들이 등산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산상 터에는 등산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갖다 놓은 로프도 보였다.


 그리즐리는 지치는 기색 없이 산을 올랐다. 그는 기력이 아주 모자랐음에도 그리즐리를 따라가는 것에 격한 무리는 없었다. 분명 숨은 턱까지 찼다. 하지만 보통보다 약간 빠르게 걷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것이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기이한 일은 곰이 나타났을 때부터다. 


 어느새 해발 800미터까지 올라왔다. 산 위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운무의 잔재가 뿌옇게 그림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와 그리즐리는 그렇게 산 위를 오른 끝에 두 개의 봉이 보이고 그것이 축융봉이라고 그리즐리는 말해주었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장인봉과 하늘다리도 비록 흐리기는 했지만 보였다.


 "아직 새벽이라 사람들이 없습니다. 축융봉의 밑으로 내려가면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굴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괄태충이 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절벽 같은 바위벽을 기어내려가야 하니 위험합니다. 함고동 씨는 나의 등에 매달리십시오." 그리즐리는 허리를 약간 굽혀서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어떻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즐리는 그의 두 다리를 잡고 그리즐리의 등으로 밀어 올렸다. 그는 엇? 하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그리즐리의 등에 올라탔다. 등에 올라타니 안정감이 들었다. 그리즐리는 등에 그를 매달고 축융봉 밑의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굴 하나가 나타났다. 굴은 시작부터 음험했으며 괄태충이 살아서 그런지 아주 습한 기운과 누린내가 기분 나쁘게 풍겼다. 그는 그리즐리의 등에서 내려왔다. 굴의 입구에서부터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고 기분 나쁜 굴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몸이 덜덜 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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