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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3. 2021

무기력엔 맛있는 걸 먹자

일상 에세이

가자미를 구워서 먹자 무기력엔 맛있는 걸 먹어야지


무기력


보통 무기력하면 입맛이 없다는데 나는 무기력이 와서 등에 착 달라붙어도 밥맛은 좋기만 하다. 입맛이라는 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무기력을 느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말 그대로 무기력이다. 기력이 없다. 의욕도 없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고 마음은 점점 어두워져 우물 밑바닥으로 꺼지고 싶다. 당연히 밥맛도 떨어져야 하는데 모든 것이 무기력의 조건에 다 들어가도 밥맛 만은 좋다. 무기력이 찾아오면 얼씨구 하며 맛있는 걸 찾아 먹는다.


예전에도 친구들과 삼겹살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나 무기력이야,라고 하면 친구들이 응, 그래. 한 마디 대꾸해주고 끝이다. 나에게는 옛날부터 무기력과 입맛의 부등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경우 무기력은 계절을 따라온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나 초여름에서 본격적인 폭염으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쯤에 온다. 하루나 이틀 정도 굉장하다. 무기력에 사로 잡히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못한다. 봄에 느닷없이 닥치는 무기력에서도 비빔밥으로 해결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716 

사실 봄에 오는 무기력은 무기력이라기보다 무력감이다. 무기력과 무력감은 엇비슷한데 사전적으로 찾아보면 무기력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음'라고 나와 있고, 무력감은 '스스로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드는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느낌'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기력과 무력감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봄에 찾아오는 무기력은 무력감에 가깝다. 말 그대로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그런 기운이 벚꽃과 함께 온 몸으로 쏟아진다.


그에 비해 여름에서 본격적은 여름으로 가는 이 길목의 하루 이틀 정도 오는 건 무기력이다. 만약 내가 회사를 다녔다면 열두 번도 더 잘렸을 것이다. 댕강댕강 잘렸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기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짱 박혀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무기력하게 있어봐야 부장님의 찢어진 눈에서 쏘는 레이저를 받거나, 비빔국수를 먹고 믹스커피를 마신 후 한 모금의 흡연을 한 그 무시무시한 입으로 나에게 욕을 왕창 날렸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화장실에 숨어서 무기력을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짱 박히는 게 더 잘릴 이유네.


근래에도 하루 이틀 정도 무기력에 시달렸다. 조깅을 할 때 무기력은 큰 걸림돌이다. 보통 달리는 것처럼 달리면 금방 숨이 차고 몸이 농성을 한다. 다리도 무거워서 전혀 평소처럼 달리지 못한다. 그럴 때 욕심을 내고 평소처럼 달리면 심장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엄청난 과부하가 느껴지는데 그럴 땐 걷는 수밖에 없다. 보통 무기력은 계절을 탈 때 동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을을 타고, 그때 무기력을 느끼기도 한다는데 나는 봄이거나 여름에서 좀 더 여름으로 넘어가는 기묘한 시기에 계절을 타고 무기력을 느낀다.


무기력을 좀 더 다독이기 위해 며칠 가자미 구이를 먹었다. 너무 입맛 돈다. 미칠 지경이다. 생선구이의 묘미는 잘 구워진 등을 젓가락으로 죽 떠서 입 안 가득 먹는 것이다. 그리고 맥주나 와인을 곁들어서 홀짝인다. 정말 꿀맛이다. 가자미 구이는 언제나 맛있지만 무기력할 때 먹으면 좋은 치유제가 된다. 보통은 가만히 있으면 무기력증은 지나간다. 무기력이 심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가 매년, 매 시기에 느끼는 무기력은 일종의 희구 같은 것이다. 살아있다고 보내는 신호.


그래서 무기력이 오면 무기력을 떨쳐 버리려 하기보다 내가 살아 있으니 이런 신호가 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혼자서 축하를 하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이런 기묘한 감정이 때가 되면 찾아와 주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보통 브런치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치부나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뱉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나도 결심을 하고,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예전에는 브런치에 그런 글을 몇 번 적었다. 이렇게 매일 글을 적게 된 데는 불안 때문이고 그 불안이 나를 텍스트의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시신경이 조금 망가졌기 때문에 생활에 불편함이 있다. 그리고 망가진 시신경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점점 망가져간다. 확대되고 왜곡될 뿐이지 축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 잠들기 직전까지 매일,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되는 불안에 산다. 시야가 나빠지는 게 아니라 시야가 소멸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은 마음을 둘 곳을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이의 느닷없는 죽음(이게 나의 불안을 더 키웠다) 그리고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고 하던 녀석의 갑작스러운 자살시도는 나를 굉장한 충격에 빠트렸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처럼 태어난 김에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생활규칙을 정하고 그 반복을 매일 이어가야 한다. 거기에는 매일 요만큼 분량의 소설을 적는 것과 조깅이 있다. 심장에 건강한 무리를 매일 준다. 불안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자아가 나의 고민이며 늘 나의 자아와 싸우게 된다. 자아는 불안을 키우고 그 불안은 연쇄를 일으킨다. 중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안과 늘 타협을 하고 고민을 한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알 수 없는 미래의 크고 작은 불안에 대한 생각은 매일 보는 생리작용과 같다.


그런 의미로 무기력이 오면 환영하지는 않지만 빨리 나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살아있지 않다면 이 무기력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무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가자미 구이를 실컷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대부분은 추억에 기인한다. 그 추억 때문에 그 음식이 맛있다. 살아있는 동안 크고 작은 불안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료처럼 여기고 평생 토닥이며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리고 맛있는 걸 먹자. 하루키는 좋은데 소확행이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맛있는 걸 밥상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작지만 소중한 행복이다.


한 곳에서 15년을 있었더니 그때 왔던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와서, 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네요, 같은 말 하는데 이 자리에서 변화하되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도록 내 개인적으로는 치열하게 생존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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